진공 : Vide, Vacuum
충분히 자고 눈을 뜨는 시간, 7시 30분에서 9시 30분 사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아직 이른 아침이라는 걸 자각하고 기분이 좋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서 인스타그램, 블로그, 카페 등을 둘러보고 잠이 완전히 깨고 나면 넷플릭스도 좀 보고 전 세계적으로 심각해지는 코로나 뉴스도 보고 나면 12시쯤이 된다.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나 이불 정리를 하고 거실의 암막 커튼을 젖히니 날씨가 좋아 보인다. 기분이 좋았다. '아, 집에 있기 참 좋은 날씨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집 밖에 나가지 않을 수 있다면, 한낮의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겠지만 그게 너무 좋다. 도서관에 가서 좋아하는 책을 빌려오는 일, 시장에 가서 그날 먹을 걸 조금 사들고 돌아와 밤이 되면 간단히 요리하는 일. 왜 내가 아무도 없는 한낮의 집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완벽한 정적. 16층 우리 집 창 밖엔 하늘이나 저 멀리 앞동 밖에 보이지 않아 사람도 없고 옆집, 윗집, 아랫집 모두 밤에는 쿠당탕 소리를 내지만 낮에는 샤워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는지 대부분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다. 환하게 볕이 들어오는 커다란 책상에서 베란다를 바라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게 너무 좋다. 이 화창한 고요는 내가 충전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첫 직장을 다니면서 독립을 한 날부터 그랬다. 하루 종일 말을 하고 이야기를 듣고 집에 오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티브이도 없는 방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와서 뜨거운 방바닥에 앉아 책을 읽다 잠드는 일. 그게 최고의 사치이고 행복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말하지 않는 것. 순간의 정적만큼 바람 소리나 반복이 아닌 사소한 소음,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밝은 빛, 발에 밟히는 낙엽의 소리나 봄이 되어 폭삭해진 땅의 느낌 같은 것들. 창이 있고 볕이 잘 드는 조용한 집과 책, 신랑과 함께하는 식사. 왜 낮일까 생각해보니 밤이 되면 아무래도 전등을 켜야 하고, 건조하면 가습기도 틀고, 더우면 에어컨도 켜고, 추우면 보일러도 킨다. 압력이 맞지 않아서 소리가 나지만 특별히 고칠 필요는 없다고 한 보일러가 돌아갈 때 나는 기계 소리, 마루를 밝히는 전등의 미세한 주파수 소리, 어째서 밤에만 잘 들리는 냉장고 가스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들. 미세먼지가 많은 날은 공기청정기도 틀어야 하고 신랑이 오면 컴퓨터를 하기도 하고 티비를 보기도 하니까 그런 게 들린다. 그런데 한낮의 고요는 보다 진공에 가깝다. 왜 좋은지 생각하다 보니 길게 쓰게 됐는데 오늘은 화창한 날씨가 기분이 좋았다. 설거지나 청소를 좀 하고 요 며칠은 무언가 먹겠다는 의욕이 있기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식사를 한다. 운전도 4일째 빠트리지 않고 한다. 무언가 사고 싶은 욕구도 생겨서 카드사 기준 충족을 위해서 열심히 쇼핑도 했다. 보이차, 그린 주스, 무화과 뉴트리션바와 유기농 퀴노아 누룽지 과자, 운전할 때 입기 좋은 경량 패딩, 봄에 입을 얇은 티셔츠. 안 좋았을 때 여실히 느꼈던 건 이제는 내게 느껴지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더욱 소중히 하고 순간을 믿기로 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거였다. 먹을 수 있을 때, 잘 수 있을 때, 할 수 있을 때, 갈 수 있을 때. 할 수 없을 때는 내 경우는 잠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쓸 수 있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말하고 싶지 않은 게 걱정이다. 선 없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어오진 않을지, 아니면 유령처럼 냉소적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속에 적응하기 위해서 무리하면서 괜한 너스레를 떠는 건 아닐지. 그래도 월요일엔 칼퇴하고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날 거고, 그러면 화수목금 4일만 가면 또 주말이니까 그렇게 이번엔 조금 더 면역이 생겼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