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의 길
작년 12월 3일, 야근을 하다가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밤 11시. 단 두 사람이 두드리던 키보드 소리가 멈춘 틈을 채운 탄식.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자. 나는 삼월에게 말하며 가방을 챙겼다. 차를 타러 가는 길, 새까만 도로 위에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을까 봐 목덜미 위로 소름이 쭈뼛 솟았다.
경험한 적 없으나 경험한 것. 간접적으로나마 뇌에 새긴 것. 내가 겪어 보지 못한 과거 그림자의 실체가 몸집을 키워 눈 앞에 드리워지던 순간. 그 밤의 섬뜩함이 아직도 삼엄하게 도사리고 있다.
4월의 마지막 날, 지인을 만나러 광주에 다녀왔다. 민주 정신이 거룩하게 깃든 곳이니 가만 있을 수 없어 5.18민주화운동기록관과 전일 빌딩을 관람하고 저녁에는 지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머물렀다. 지인은 울산이 고향이었고, 지인의 동업자는 광주가 고향이었다. 경상도의 딸들이 나의 부모, 조부모의 표를 상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동안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에 살고 있는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기만 할 뿐이었다.
“나 초등학생 때, 우리 할매가 내 손을 잡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어. 우리 집에서 시내까지 갈라면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는데. 할매가 거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고 하대. 나는 뭣도 모르고 따라 갔재. 거기 갔드니만 사진이 많은 거야. 이빨이 막, 머리에 달린 것부터 해가지고…… 내가 무섭다고, 할매한테 집에 가자고 했드만 할매가 너도 알아야 한다고, 봐야 한다고. 그땐 시체 사진을 여과 없이 보여줬재.”
아버지와 아들의 제삿날이 같다는 그 도시는, 군인들의 총과 칼에 나의 가족과 나의 이웃을 잃은 그 도시는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자격이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간 권력이 얼마나 흉측하게 변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몽처럼 사라져 갔는지. 그래서 그 도시만은 변하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붉은 피를 지혈할 수 있던 것일까.
지인은 내게 부산으로 돌아가기 전 반드시 5.18국립묘지에 가보라고 했다. 그곳 추모관에 처음 갔을 때, 눈물이 나와 어쩔 줄 몰랐었다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숙소를 나오자마자 운정동으로 향했다.
국립5.18민주묘지 진입로에는 이팝나무의 새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떠난 이들 가는 길 배 곯지 말라고, 쌀을 닮은 꽃이 피는 나무를 심은 사람들. 우리가 그들의 문드러진 심정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청아한 햇살과 바람을 맞이하다가도 나는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민주의 문을 지나자 거대한 위령탑이 보였다. 그 뒤로 수많은 봉분과 묘비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무덤을 내가 들여다 보아도 되나.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둥그렇게 올라온 봉분을 바라보아도 되나. 이곳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거짓된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감정 없는 묵념을 하지 않았던가. 두렵지도 않았을까, 그 사람들은.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굶주린 배에 탐욕과 함께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갈기갈기 찢어 욱여 넣었던 그 사람들은. 매일 편히 잠을 잤을까. 주춤거리며 계단을 올라 비석에 적힌 이름을, 사진을 보았다. 한 바퀴 돌아 비석 뒷면에 전해지지 못한 말들을 읊다가 왈칵 눈물이 터졌다. ‘사랑하는 내 딸아’ 생때 같은 열일곱 딸 잃은 엄마의 슬픔이 문장에 어른거렸다. 비석 표면에 움푹 들어간 활자로 남은 산 자들의 말을. 기억의 마디들을. 차마 다 읽지 못하고 눅눅한 눈가 훔치며 내려와 유영봉안소 입구를 지났다.
공간을 빙 두른 영정 사진들. 서늘하게 가라앉는 공기. 바깥은 찬란한 햇빛과 푸른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거리는데, 그곳은 한 시절 존재했던 사람들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이, 한때는 나와 똑같이 숨을 쉬고 내일을 향해 내달렸으며 자유를 외쳤을 그 얼굴들이, 그곳에 그렇게나 많이…. 차게 식은 마음 한가운데에서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뭐라 형언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기만 했다. 그들은 볼살이 통통한 어린 아이에게, 머리가 하얗게 쇤 노인에게 총을 겨누면서도 아무런 죄책이 없었을까. 그것이 죄악이라 여기지 못 했을까.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그들의 손등을, 소리 내는 그들의 입을, 살려달라고 말하는 그들의 눈을 조준하면서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을까.
4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온전하다고 할 수 있는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불의로 까맣게 탄 자리에 꽃이 피나 싶다가도, 또 다른 불의가 화마처럼 덮쳐오고, 우리는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가슴에 횃불을 품고 광장으로 나가고, 또 불의를 맹신하고 굴종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불의를 키우고, 또 그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시 말소되기 직전까지 허락된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기억하고 위로하고 지키고 어디에 어떻게 침묵하고 있을지 모를 불협과 맞서고 평형을 맞추고 시대를 살아갈 것이다. 시대가 저물고 계절이 바뀌어도 피로 물든 상실을 가여워 하면서, 애도하면서, 다음 시대를 살아갈 이들을 위해 기록하면서.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한 강/ 소년이 온다
그해 광주의 오월이 산 자인 우리를 지켰다.
모독과 폄훼가 광란하는 서면 위로 추모를 눌러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