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극호 리뷰입니다. 스토리나 인물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MCU가 많은 팬들을 소유하고 있으나 사실 나는 그 세계관 속 1세대 히어로들에 대해 잘 모른다. 자체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 나온 그들의 서사를 하나하나 살펴봐야 하는데 여태 나온 시리즈를 챙겨 보기에 양이 방대하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결말을 알리는 어벤저스: 엔드게임도 보질 않았다. –스포는 다 알고 있다는 게 함정- 어쩌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은 마블 최초 동양인 히어로의 신호탄인 동시에 내게는 본격적인 2세대 마블 히어로 세계관 입성 첫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2세대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1세대 히어로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세대가 교체됐다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꾸준히 이어지고 히어로들끼리도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아이언맨 시리즈와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고 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스치듯 지나가는 ‘만다린’에 관한 내용을 이해하고, 중간에 등장하는 ‘웡’을 낯설게 느끼지 않으려면 말이다.
영화는 지난 토요일에 보고 왔다. 원래 한산한 극장인지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영화가 영화인지라 상영관이 꽤 북적북적해서 놀라웠던 기억.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추천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양조위가 나온다길래 보러 간 거긴 한데 극장을 나서면서도, 혹은 지금까지도 영화의 여운에 젖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널리고 널린 할리우드 영화에서 다루었던 액션신이 각종 최신식 무기를 이용해 이루어진다면 이 영화는 맨몸 액션이 주다. 특히 오프닝에 해당하는 버스 액션 신에서부터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감을 이끌어냈고, 쿵후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흥미진진한 장면을 연출해냈다.
관람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에 대해 한 번 정도는 관심을 가져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동안 서양에서 동양인 캐릭터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당해 왔는가. 대표적인 예로 영화의 주인공인 시무 리우가 출연했던 캐나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에 대해서도 말해야겠다. 해당 시트콤은 캐나다로 건너간 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나 제작진은 전부 비동양인이었으며 더욱이 스토리의 토대를 마련했던 한국계 캐나다인 작가를 중간에 배제했다고 한다. 해당 시트콤은 시즌 5를 마지막으로 종영했는데 이 이유 또한 어이가 없다. 극 중 유일한 백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핀 오프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기 위해서였고 배우들은 위 사항을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이 내용은 시무 리우와 진 윤의 폭로로 알려진 사실들이다.
마블 ‘닥터 스트레인지’에 등장했던 에이션트 원도 원작에서는 티베트인 남성이지만 영화에서는 틸다 스윈튼이 배역을 맡았다. 캐스팅의 다양성을 위한 결과라고 마블 측에서 일축했지만, 굳이 아시아계 인물을 백인으로 바꾼다는 것도 납득이 가진 않는다. 그렇다면 어벤저스에 등장했던 닉 퓨리는 왜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꾼 것인지? 그들이 주장하는 ‘다양성’에 아시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덕에 MCU에서 아시아계 히어로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웡’이 유일했다. 그런데 이 세계에 최초의 아시안 히어로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한편 스토리는 우리 입장에서 뻔하기도 하다. 미국에서 평범하게 살아오던 주인공이 사실은 대단한 부모 밑에서 자란 싸움 왕이었으며 안타까운 과거를 숨기고 살아왔다는 것. 오래전 헤어진 동생을 전투장에서 우연찮게 재회하는 것까지. 다소 클리셰가 가득하다. 그러나 여기에 양조위를 얹는다면?
양조위는 샹치의 아버지이자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빌런으로 나온다. 천 년을 넘게 권력을 뒤쫓고 탐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를 정복하고 살생을 불사하던 그가 여인을 만나 과거를 뒤로하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의 삶을 택한다. 하지만 아내가 떠나고 야욕에 사로잡혀 제 자식들을 방임하고 심지어 아들에게 살인을 가르친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빌런이라 칭하기에 악의 농도가 옅다. 그는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다. 단지 아내를 다시 만나고 싶을 뿐. 이렇게 설득력이 부족한 스토리 전개에 양조위의 존재가 관객을 종용한다. 그의 슬프고 아름다운 눈을 볼 때마다, 자꾸만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돌아온 월요일, 팀원들과 밥을 먹으며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들은 무심히 반찬만 집어 먹으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양조위 눈빛을 보는 순간 그의 행동 전부를 이해하게 된다니까요.”
“양조위요?”
“중경삼림, 혹시 몰라요?”
“중경삼림이요?”
“그렇구나…”
나도 중경삼림을 올해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보긴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양조위를… 먼 고조선 사람 보듯 나를 쳐다보던 우리 팀원들의 눈망울이 떠올라 다시금 외로워진다.
쑤 샹치의 동생인 쑤 샤링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서사적으로는 샤링의 이야기가 여성 관객들에게 더 와닿을 수도 있겠다. 오빠가 혹독하게 무술 훈련을 받는 동안 샤링은 딸이란 이유로 배척당하며 아버지는 죽은 아내가 떠오른단 핑계로 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결국 어깨너머로 무술을 익혀 실력자로 성장한 캐릭터. 엔딩 쿠키 장면에서 그녀의 선택을 떠올리면 또다시 가슴이 웅장해진다. 덧붙여 한 가지. 비동양인들이 만드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동양인 여성 캐릭터들의 스타일을 떠올려보자. 촌스러운 붉은색이나 보라색 브릿지가 번뜩 생각나진 않는가. 이번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깔끔한 흑발이다. 서양인들의 세계에서 일반화해버린 오버스러운 비주얼을 당연하다는 듯 버리고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거슬리는 게 없었다. 이것도 쑤 샤링 역의 배우 장멍얼이 감독에게 건의해서 바뀐 거라고 한다. 왜 브릿지를 버리지 못하니, 감독들아.
개인적으로 <닥터 두리틀>을 즐겁게 관람한 사람으로서 영화에서 지나갔던 다양한 상상의 동물들이 모습을 드러내 반가웠다. 서양인들에겐 낯설 수 있는 구미호, 해태, 불사조가 할리우드 식 CG로 그려지며 무게감과 완벽을 더했다. 누구는 유치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면 동양의 전해져 오는 신화와 문화들을 왜곡 없이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깊은 물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용을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재생된다. 블랙팬서 개봉 당시 왜 그토록 흑인들이 열광했는지 알 것도 같고. 어쨌건 4D나 아이맥스에서 관람하면 실감 나고 즐겁게 관람할 수 있을 듯하다.
드디어 백인 남성 히어로, 백인 여성 히어로, 흑인 남성 히어로를 거쳐 동양인 남성 히어로까지 도달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아시안 중심의 영화로 흥행의 선례가 된다면 추후에 개봉할 이터널스에서도 배우 마동석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질 수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추후 아시안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 또한 제작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