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인간의 역사는 전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본성에 공격 세포가 내재되어 있는 건 아닌지 가끔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이며 휴전을 선언한 국가다. 중동에서는 여전히 분쟁이 지속되고 있고 무고한 국민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지구 상에 인간이란 존재가 뿌리를 박고 살고 있는 한 이 행성은 끊임없이 분열하고 폭발할 것이다.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종교.
이슬람교: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 주장.
영화는 나왈이라는 여자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녀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은 알 수 없는 암호들처럼 뒤엉켜 있었다. ‘유년기는 목구멍 속의 칼과 같아서 쉽게 뽑을 수 없다. 약속을 어긴 자는 비문이 필요 없다. 세상을 등지도록 시신을 엎어달라. 시신은 나체로.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워도 좋다.’ 이와 같은 말과 함께 그녀의 자식인 쌍둥이들에게 각각 편지 하나 씩 남기고 이것을 아버지와 형에게 전달하라 명한다. 남매는 갈등했고, 결국 그들의 핏줄을 찾기 위해 어머니의 나라로 향한다. 그녀가 살던 나라는 오랜 갈등으로 내전을 겪고 있는 한 중동 국가였다. 정확한 국명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를 레바논이라 유추한다. -레바논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차 내전이 발생했으며 2000년대 들어서 2차 내전의 발발로 현재 3단계를 향해 가고 있다고 한다.-
초반부, 나왈이 사랑하는 남자와 도망을 가려다 형제들에게 들키고 마는 장면이 나온다. 기독교 집안인 여자와 무슬림인 남자. 그녀의 형제들은 주저 없이 남자의 뒤통수에 총알을 갈기고 그들의 핏줄이자 가족인 나왈을 명예살인이란 명분으로 죽이려 하지만 할머니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명예살인은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을 죽이는 관습이다. 그러나 해당 대상이 여성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굉장히 불합리하고 혐오적이다. 인간의 존엄성마저 거역하는 신념이 과연 올바른 신념이 맞긴 한가. 요르단과 이집트, 예멘 등 이슬람권 국가에서 순결이나 정조를 잃거나 간통한 여성들을 상대로 이 관습이 자행된다. 관습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현실이다. 중동은 여성 인권이 후퇴하고 있으며 많은 여성들이 박해당하고 있는데, 그런 그들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결정은 남성으로부터 내려진다. 설령 강간을 당했다 치더라도 모든 책임과 비난, 더 나아가 죽음까지 여성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이 관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중동에서는 명예 살인당한 여성들의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며 그 실재를 증명한다.
나왈은 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한 상태였다. 이슬람교 남성의 아이들은 종교 선택의 자유 없이 태어난다.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무조건 이슬람교에 예속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선택의 권리까지 침해하면서 종교를 믿어야 하는 걸까. 내가 무교이기에 무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겠다. 어찌 됐건, 아이를 출산한 그녀는 나중에 아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자그마한 핏덩이의 발 뒤꿈치에 지워지지 않는 점 세 개를 찍어 고아원으로 보내고 할머니의 바람대로 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매진하며 세월을 보낸다. 어느 날 학교가 무슬림의 공격을 받고 봉쇄되면서 그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고아원으로 향한다. 그녀가 도착했을 땐 이미 고아원이 기독교 국민당에 의해 폐허가 된 뒤였다.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버스에 탑승한다. 승객 대부분이 무슬림인 이 버스는 기독교 민병대의 공격을 받고, 그녀는 십자가를 내보이며 지옥에서 살아남는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자인 그녀는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고 어린아이까지 무차별적으로 사살하는 종교 집단에 회의와 절망, 분노를 느끼고 결국 기독교 국민당의 수장을 암살한다. 무신론자, 회의론자에 가까운 나는 의문이 생긴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단지 신을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의심이 팽배할 뿐. 인간이 세운 역사에 차별이란 언제나 밑바탕이 되어 왔다. 존재를 피력하고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 혐오의 방식은 참 쉽다. 이 작품에서 반전을 향해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는 사건이다. 참극의 발단은 나왈이 감옥에 들어가 온갖 고문과 학대를 받으며 시작된다. 비로소.
이후의 이야기는 아주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글을 아끼며 내가 결말을 확인했을 때의 감정만을 서술하고자 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와 영화를 함께 관람한 삼월 모두 한 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의적 침묵이 아니었다. 누가 목을 콱 움켜쥔 것처럼, 뇌를 쥐어짜는 것처럼 어떠한 소리도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반전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탄성이 아닌 탄식. 전쟁은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이 더 나아가 개인과 개인의 대립으로 그 피해 또한 무고한 개인이자 집단으로 확장된다. 어느 누가 나서서 비극을 끊어낼 수 있을까. 혐오와 탐욕이 이 세계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않을 때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절망이 사라질 수 있을까.
영화를 본 뒤 영화를 소개했던 방구석 1열을 찾아보았다. 게스트로는 분쟁 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김영미 PD가 출연해 현장의 생생하고도 참혹한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영화 속 결말이 어쩌면 현실에도 충분히 있음 직하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현실들이 픽션을 뛰어넘었던가. 스토리를 극대화하기 위해 등장했던 허구의 장면들은 얼마 안 가 현실이 되어 뉴스에 보도되었으며 나는 더 이상 영화나 드라마를 무구한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과장은 과장이 아니었으며 가짜로 둔갑한 이야기들은 진실로 구현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주변인에게 추천을 하기도 했다. 실상 본 이들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반전의 충격을 공유하고 싶기도 했고 한 번쯤은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불타 사라지고 있는지. 활활 타오르는 화기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욕심이란 불씨를 피하지 못해 마음이 사라지고 몸이 사라지는 것. 나는 이것을 사람들이 불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1+1=1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