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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Sep 19. 2021

이상적인, 아니 정상적인 언론

<스포트라이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 즐비한 기사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클릭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누군가를 티 나게 겨냥한 비난에 가깝거나, 온갖 루머와 자극성을 첨가한 저품질의 기사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언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기꺼이 약자의 편에 서서 폐단을 고발해야 하며 소외받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그들의 입장에서 펜을 칼처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봐 왔던 언론들은 자극에 자극을 더해 루머를 생산했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로 피해자를 생성하고 방임했다. 강자에게 쉽게 정복당하고 약자에게 쉽게 등을 돌리는 이들. 내가 아는 기자들이란 그런 사람들이었다.

 

 “언론이 제 기능을 수행하려면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가톨릭 교회에서 수십 년에 걸쳐 벌어진 아동 성추행 스캔들을 보도한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 기자들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실제 이 기사를 보도한 ‘스포트라이트’ 팀은 퓰리처 상을 수상했고, 해당 영화는 제69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2001년 보스턴 글로브에 새로운 편집장이 부임한다. 야구에 관심 없는 유대인, 미혼의 남성. 남자는 심상치 않았다. 그는 완벽한 이방인으로서 단호하면서도 냉철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부임 후 첫 회의에서 아동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가톨릭 사제 게오건 신부에 관한 주제를 거리낌 없이 꺼냈고, 스포트라이트 팀에게 취재를 요청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건 미국 보스턴 내 경제적 기반이자 정치적 주축, 엘리트 인물들이 대부분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라 미국 내 다른 지역보다 가톨릭의 파워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스턴 글로브 구독자 중 가톨릭 신자들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걸고넘어진다는 사실에서 기존 기자들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명 ‘이방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끈끈한 유대관계로 형성된 집단은 ‘보스턴 지역 유지’들과 ‘가톨릭 신자’들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건 그들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편집장 배런과 변호사 개러비디언이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역 주민과 현지 경찰이 불법행위를 담합하고 묵인함으로써,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인신매매와 임금체불, 폭행과 학대 같은 인권 유린 범죄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고 지역 내에서 꾸준히 관행되어 왔다. 신안이 살기 좋은 섬으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지역 관료들 모두 외부인들로 교체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공무원 중 어느 누가 자진해서 썩은 뿌리를 파내려고 할는지.

 

사건의 첫 시작은 신부 한 명. 게오건이었다. 아동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신부가 몇 년 간 지속적으로 교구를 옮겨 다니며 수십 명의 아동을 추행했고, 이것을 추기경이 묵인했다는 내용의 문건으로부터 시작된 취재는 구덩이를 파면 팔수록 묻혀 있던 거대하고 추잡한 비리의 뼈마디들을 발견해간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실은 매우 조밀하고 조직적인 행태였다는 것. 영화의 이점 중 하나는 불편한 진실을 다루고 있음에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거다. 영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자극적이거나 극적인 효과 없이 강물이 흘러가듯 잔잔하게 이야기를 서술한다. 예를 들어 피해자들이 등장해 피해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 또한 불필요한 재연 없이 그들의 진술에만 초점을 둔다. 그러기에 보는 나 또한 담담히, 사실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가난한 집 아이라면 종교에 크게 의지하게 돼요. 신부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죠. 이건 신체적 학대를 넘어 영적인 학대예요.”

 

일명 그루밍 범죄. 부모의 이혼이나 가난, 성 정체성 등으로 방황하는 아동 청소년들에게 사제는 ‘믿음직한 어른’으로 접근한다. 아동이 사제를 완전히 믿고 따르는 수준에 이르면 성폭행을 시도한다. 이것 또한 약한 수준에서 발각되지 않는 이상 수위를 더해가는 것이다. 교구는 지역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막강한 영향력과 자산을 이용해 피해자들에게 소액의 보상금으로 발설하지 않을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사태가 잠잠해지면 가해 사제는 다른 지역으로 전출된다. 이후 처벌받지 않은 가해자는 재범을 하게 되고 피해자는 증가한다. 이런 식으로 범행이 십 수년을 지속되어 온 것이다. 피해자 모임 중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 성직자에게 피해를 당한 아동들이 성장하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술이나 마약 혹은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들을 생존자라 부른다고. 요즘처럼 권력에 의한 성추행과 폭력, 혐오에 따라 발생하는 범죄들로부터 무방비하게 노출된 사회적 약자들 또한 생존자는 아닐까.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니까. 이러한 말은 영화에도 등장한다. 스포트라이트 팀 안에서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주요 문건을 손에 넣은 기자 마이클이 당장 기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나 그 문건은 신부 한 사람에 대한 내용이었고, 섣불리 보도했다간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교회 측에서 조용히 사건을 묻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팀장인 로비가 이를 저지한다. 우리는 체계를 파헤쳐야 한다고. 가해자 개인이 아닌 거대한 조직, 교회라는 큰 집단에서 암묵적으로 관행된 시스템을 고발해야 하는 거라고.

 

 “알고도 애들이 당하게 놔뒀다고요. 누가 당했을지 모를 일이에요. 팀장님이었을 수도 있고, 나였을 수도 있고. 이 쓰레기들을 잡아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아무도 못 빠져나가게 만들어야죠. 신부든 추기경이든 빌어먹을 교황이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마이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보도가 늦어지면 질수록 어딘가에서 피해자들은 계속 증가할 테니까.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으며, 사건을 취재하던 마이클 또한 심적으로 분노하고 절망했으니까. 이 영화에서 인물이 유일하게 주관적인 감정을 강렬하게 표출하는 장면이었다. 또한 가해자들은 멀리 있지 않았다. 가해자 중 한 명이 마이클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는 것. 팀원 중 한 명, 기자 멧의 동네에도 버젓이 또 다른 가해자가 살고 있었다는 것. 어플 중에 ‘성범죄자 알리미’라는 게 있다. 우리 동네에 살고 있는 성범죄 이력이 있는 범죄자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앱이다. 실상 무슨 소용이 있을까. 범죄라는 건 가해자가 있는 한 절대 사라질 리 없는데. 약자들이 피한다고 피했으면 여태껏 많은 사람들이 범죄로부터 목숨을 건졌을 거다. 대한민국의 법은 이상할 정도로 범죄자들에게 친절하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신경 쓰는 기묘한 나라. 

 

심층 취재 과정에서 스포트라이트 팀은 피해자들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고 지역 고위직들에게는 압박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수년 전 피해자와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들이 신문사에 가해 사제 리스트를 비롯해 성추행 피해 사실을 제보하였으나 언론에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건은 거대한 구조 속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당시 6개월 동안 보스턴 글로브에서 보도된 해당 사건 관련 기사는 단 두 건이었다. 팀장인 로비가 자신이 이미 수년 전 20명의 신부가 저지른 성추행 사건을 후속 기사 없이 덮었다며 과오를 인정한다. 이렇게 묵살된 사건들이, 방치된 가해자들이 점차 몸집을 불려 갔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 곰팡이처럼 퍼진 것이다. 영화는 저널리스트들의 노고를 조명할 뿐 아니라 과거에 그들이 모르는 척 지나치고 묵인했던 사실들을 꼬집는다. 그러나 그들이 일부 언론인들과 다른 건 실수를 인정하고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  

 

언제 끝으로 치달았는지도 모르게, 영화는 조심스럽게 결말을 보여준다. 마지막 연속적으로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얼마나 짜릿한 전율을 선사했는지. 그들은 누군가가 길을 열어주길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숨을 죽이고 숨어있다가 누군가 플래시를 켜주길 기다렸다. 비로소 불이 켜졌을 때, 그들도 손에 들고 있던 촛불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그게 스포트라이트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과도 같았다. 그동안 피해자들이 빛도 들지 않는 과거의 트라우마 속에서 홀로 견디고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지금도 많은 입들이 열렸다가 닫히길 반복한다. 대개 그 입들은 어렵사리 열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관심하게도 그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우리는 여태 얼마나 많은 다수의 입들을 진실을 구분한다는 명분으로 가려 왔던가. 피해자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도 모자라 피해자는 피해자답기를 강요하며 검열한다. 

 

영화는 말미에 이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낸 관련 보도만 약 600건이었다. 보스턴 대교구 성직자 249명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 보스턴의 생존자 수는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002년 12월, 로 추기경은 보스턴 대교구에서 사임한다.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으로 재발령 되었다.

 

이후에는 해당 사건 뒤에도 성추행이 발생한 지역들이 줄줄이 나열된다. 끝이 없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추악한 지옥이 끊임없이 건설된다. 성서를 뒤집고 신의 이름을 빌려 흉포한 교리를 설파하는 무도한 이들이 아직도 넘치고 흐른다. 이 세계는 언제쯤 정상의 범주에 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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