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포일러 포함. 영화 자체의 해석과 무관하며 개인적인 생각을 써 내려 갔음을 알립니다.
단순히 제목만 보고 고른 작품이었다. 얼핏 듣기로는 나이 차가 심하게 나는 여자와 남자가 나온다기에. 심히 불순한 의도였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영화는 책이 원작이며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해당 영화로 생애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사실들을 무자비한 폭격처럼 던져주는 영화였다.
초반부를 보다 보면 어린 소년과 성인 여성의 비정상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싶지만, 두 사람이 이별 후 앳된 소년이 청년으로 자란 뒤 법대에 입학해 재판을 참관하는 장면을 기점으로 뒤통수가 얼얼해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나는 한나가 마이클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지 의구심을 품었다. 나는 한나가 마이클이란 사람 자체를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 책을 읽어주는, 결국 제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될 수 있는 소년을 좋아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두 사람이 만나 완벽한 하나로 응집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 협소한 시선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한나가 쥐고 있었으며 마이클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한나가 하얗게 테두리가 그려진 우유병을 비워내고 말도 없이 증발해 버린 뒤에도 마이클은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자랐다. 그렇다면 한나는 왜 마이클을 떠났을까.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으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서로의 차이를 인식해 버려서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한나가 사무직으로 승진된 시점. 문맹이었던 그녀는 결국 자신이 글을 모르는 것을 숨기기 위해 떠나는 것을 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가 마이클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나의 의견에도 한 걸음 확신이 생긴다. 한나가 어린 애인과의 영속보다 스스로의 치부를 가리는 데에 급급했다는 뜻이니까.
중반부터 영화의 흐름이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간다. 성인이 된 마이클이 한나를 다시 만난 곳은 전범 재판장이었다. 그녀는 유태인 수용소 감시관으로서, 수감자들을 선별하여 가스실로 이동시키는 일을 했다. 그녀는 학살에 가담했고, 명백한 가해자였다. 한나가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직무였다고. 아마 그녀의 눈에 사람들은 쉼 없이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위 상품들에 불과했을 거다. 그저 처리하고 급여를 받으면 되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 앞에서 한나는 무심했고, 죄의식 하나 없이 무결한 얼굴의 여자를 볼 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최소한의 의심 같은 건 품어본 적 없는 얼굴. 또한 불이 난 교회 안에 사람들을 가둬두고 죽음을 방치하기까지 했다. 문을 열고 사람들이 뛰어나오면 사태가 혼란해지니 문을 닫아 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말한다. 한 편으로 그녀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그릇된 신념을 가진 자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득할 수 없지만, 무지몽매한 이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배움의 기회. 새로운 지식을 확립하면서 그들이 가진 생각의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녀에게 올바른 배움의 기회가 있었다면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로 인해 그녀는 해당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 감시자가 아닌 모든 것을 총괄한 총책임자로 궁지에 몰린다. 그 당시 작성된 보고서 필체를 대조하기 위해 글을 써보라는 재판장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문맹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보고서를 썼음을 시인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노출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마이클의 처참하고 일그러진 얼굴에 시선이 향했다. 어린 날 열렬히 사랑하고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끔찍하고 잔인한 학살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은 이십 대 청년에게 너무도 가혹한 진실이었다. 그는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재판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로지 그 남자만이 한나의 비밀을 눈치챈다. 그리고 갈등한다. 그녀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은 결과를 뒤집을 중요한 단서였지만 그에 비해 그녀의 죄는 무거웠다. 지옥 속에 몇 백 번을 뛰어들어도 절대 면죄부를 얻지 못할 중죄였다.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는지, 나치를 벌하기 위해서였는지 마이클은 끝내 자신이 아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스스로 발목에 무거운 바위를 매달고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 시절 만난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음에도 그는 과거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살았다.
남자는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매일 책을 녹음해 보내주었다. 마이클은 끝내 그녀를 돕지 않았다는 죄책감이나 동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시절의 추억이자 결국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으로 바라본 건 아닐까. 차곡차곡 쌓여가는 테이프만큼 한나에게는 희망이 생겼던 것 같다. 그 시절의 추억과 사랑이 여전히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런 설렘을 기저에 깔고 스스로 글을 깨우치고자 하는 욕망도 생겨났을 거다. 한나의 세계는 그렇게 넓어졌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나타낸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녀의 세계가 넓어지는 만큼 그녀가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할 차례였다. 한나가 모범수로 출소가 확정되면서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한나를 위해 보호자로서 마이클이 연락을 받게 된다. 백발의 한나와 중년의 마이클이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눈다. 대화는 어떤 끈이 잘려나간 듯 순식간에 종결된다. 이 만남 이후 한나는 자신의 삶의 결핍이자 뒤늦은 행복이었던 활자들을 딛고 올라서 목숨을 끊는다. 그녀의 사유가 무엇인지 헷갈린다. 그녀가 마이클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혹은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그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 죄의식을 갖게 된 건지. 그녀가 죽음을 택한 이유가 후자의 경우라면 비로소 한나의 세계가 배움을 통해 확장되었으나, 그 속에 온전한 자신을 마주했을 때 더는 버티지 못한 것이리라. 세월을 따라 겹겹이 쌓인 죄의 중압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녀를 휩쓸고 가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둘 중 누가 과연 불행의 주인공일까?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의 초상은 한나였고, 그녀가 곧 역사였다. 한나의 죽음으로 마이클은 딸과 가까워졌고, 딸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렇다면 나는 나치가 결국 죄를 뉘우치고 죽음을 택한 것을 기뻐해야 할까. 일자무식한 한 사람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버티기 위해 악의 구덩이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경주마처럼 내달린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이만큼이나 내용을 정리하고 느낌을 써내려 왔는데도 영화의 여운을 어떤 감정으로 단정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복잡한 영화였다. 무지와 수치, 사랑. 결속 없이 뒤엉킨 단어들이 곳곳에서 사고를 헤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