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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Oct 08. 2021

세상에 구원이란 게

<친절한 금자씨>

*스포일러 포함


내가 박찬욱 감독 작품  유일하게 극장에서 관람한 영화는  하나, ‘아가씨.  영화를 처음 보았을   감독의 미장센이  취향에  맞나 보다 생각은 했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를 보기 망설였던 이유는 잔혹성이었다. 이를테면 ‘아가씨에서 하정우의 손가락이 잘리는 장면처럼. 신체 부위가 훼손된다는  중요치 않다.  상황이 문제다. 나는  압박감을 견디기가 어렵다. 오히려 총을 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 영화는  보는 편이다. 살면서  번도 그런 고통을 느껴볼  없다는 확신 때문일까. 손가락이 잘리거나 혀가 잘리거나, 가위에 찔리거나 하는 경우는 살면서 혹시나 겪게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그토록 겁을 내나 보다. -엉뚱한 소리 같지만 진지하다.- 어쨌거나, 그런 내가 최근에 ‘친절한 금자씨 봤다. 박찬욱 감독의 일명 ‘복수 3부작 마지막 이야기인  영화는 배우 이영애가 주연을 맡았다. ‘이영애하면 단연  인기를 끌었던 대장금이 올릴 수밖에 없다. 드라마 방영 당시 나는 어렸지만 여전히 ‘홍시' 들어간 대사를 기억하고 있다.  작품으로 인해 굳혀진 맑고 고운, 참하고 청순한 ‘산소 같은 여자이미지를 단번에 타파하고 그녀의 무한한 가능성과 뛰어난 실력을 대중들에게 보여준 계기가 바로 ‘친절한 금자씨 아닐까.


거두절미하고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복수를 끝마친 금자의 표정이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준비해왔던 복수가 막을 내렸지만 그녀는 명확히 웃지도, 명확히 울지도 못했다. 복수를 꿈이라 가정한다면 꿈을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 마침내  꿈을 이루었을  맞게 되는 허탈, 허무감과 비슷할까. 장대비처럼 그녀에게 쏟아져 내린  그럼에도 구원에 다다르지 했다는 절망이었을지도. 결론적으로 ‘원모라는 아이의 유괴와 살인에 동참했던 이금자이기에,  선생을 죽임으로써 그녀의 분노는 잠들  있었으나 원모에게 갖고 있던 죄책감은 끝내 마모되지 않았다. 그저 오랜 응어리 일부를 땅에 묻은 것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복수에 동참했던, 자기 아이들의 복수를 위해  선생에게 칼을 꽂았던 부모들의 마음은 어떨까.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기를 택한 사람들. 이들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선생이 어떤 놈인가부터 알아야 한다. 단순히 ‘요트를 사고 싶어서재직 중이었던 영어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납치해 부모에게 돈을 갈취하고 아이들을 돌려주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갖고 있던 물건들을 전리품처럼 휴대폰에 달고 다녔고 어린 미혼모인 금자의 아이를 볼모로 잡아 제가 저지른 죗값을 대신 받게 했던 사람. 죽어도  . 피해 아동의 부모들이 돌아가며 가해자인  선생을 실질적으로 응징하는 장면을 면서 실제로 저런 형벌이 허용되면 어떨까 생각했다. 피해자가 직접 피의자를 단죄할  있는 기회를 주는 . 물러 터진 대한민국의 사법 제도 안에서 피해자들은 어떻게 해서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다고 죽은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아니지만.’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죄의 숙주들이 들이마시는  지구의 공기는 아깝기 짝이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되는 거야. 속죄, 알아? 어톤먼트. 그래, 어톤먼트 해야 되는 거야. 큰 죄를 지었으면 크게,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게.”


그런 이금자의 속죄는 끝나지 않았다. 금자는 지은 죄가 많았다. 타의적으로 딸을 입양 보내야 했으 그녀의  제니는 자신을 버린 엄마에 대한 원망 속에 살아왔다. 하얀 눈이 내리던 , 금자는 제니 앞에서 두부 모양을  하얀 케이크에 얼굴을 처박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죄의식에 슬퍼한다. ‘하얀두부는 상징성이 있다. 과거 금자의 출소 당시, 그녀 앞에 내밀어진 두부를 그녀는 냉담히 무시해버리지만 복수를 끝낸 그녀는 기어이 해소되지 않는 죄책감으로 인해 두부를 간절히 원한다. 결국 제니에게 버린 죄를 용서를 받았지만 원모에게는 용서받지 못했다. 이금자는 기도했다. 이금자의 환영 , 성인이  원모가 이금자의 입에 재갈을 물렸으므로 그녀는 아마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원죄를 새기고 속죄하며 잘라버렸던 손가락은 다시 붙었지만 허리가  끊어진 그녀의   무구함은 재생되지 못할 것이다.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처음부터 금자를 서술하던 내레이션이 결론적으로 제니의 시점이었다는 것을 알리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후에 이금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제니를 외국으로 다시 보내고, 그녀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원죄의 환각 속에서 괴로워하다 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후련하지 않았다. 찝찝했다. 꿈 없이 꿈을 꿔왔던 삶의 말로에 한 줄기 빛 또한 들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피 묻은 벽지를 뜯어냈더니 곰팡이가 잔뜩 끼어 있는 벽을 마주했을 때처럼. 복수란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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