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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수 Aug 11. 2015

내 안의 불안을 감싸 안아줘

서로의 불완전성이 긴밀하게 공유될 때, 우리는 끝 모르고 깊어진다.

나에게는 결핍이 있고 오류가 있다. 불완전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도 그렇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결핍과 오류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 누구도 정확하게 이해해 줄 수 없는 내밀하고 고독한 인내. 우리는 그것이 붕괴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버티어 나간다.


타인이 보기에는 무탈해 보일 것이다. 본인이 아닌 이상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채널이 없기 때문이다. 본인도 들여다 볼 수 없는 내면 세계라면 그것은 병에 가깝지 않을까. 어떤 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결핍과 오류가 존재한다. 마치 삶이라는 긴 여행에 반드시 싣고 가야 할 수하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낙인처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결핍과 오류는 끊임없이 불안을 생성한다. 불안은 불규칙하고 불가피하다. 그래서 때때로 공허를 느낀다. 모든 삶에는 회색 구멍이 서너 개쯤 송송 뚫려 있다. 오직 자신만이 그 구멍에 눈을 바짝 대고, 바닥 깊숙한 곳을 연무처럼 뒤덮고 있는 불안을 목도한다. 허름한 우물 밑을 들여다 보듯이.


불안에게는 불안의 자리가 있다. 불안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을 담고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완전하다.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우리라는 공통의 존재가 된다. 같은 종류의 껍데기 안에서 같은 뼈대를 지니고 살아가지만 제각기 다른 불완전성을 담고 살아가는 존재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독립적인 존재들. 그래서일까? 불안을 공유하면 돈독해진다.


불안을 공유함으로써 마음과 마음이 서로를 감싸 안는다. 그래야만 상대의 우물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불안의 향취를 기억할 수 있다. 자신의 결핍과 오류를 상대에게 드러내기로 허용하는 것은 영혼의 포옹을 청하는 일이다. 자신의 불완전성이 포옹되기를 갈구할 때, 우리는 고독에게 겨우 맞설 수 있다.


이것은 친밀감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범주 안에서 가장 정확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바닥을 매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깊게, 더 깊게 자아의 우물을 파낸다. 그 안에 불안이 차오른다. 들여다 본다. 들여다 보게 한다. 그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서로의 불완전성이 긴밀하게 공유될 때, 우리는 끝 모르고 깊어진다.



camera: olympus oz80

film: kodak proimage 100



최유수, <사랑의 몽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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