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앤롤 라스베이거스 2023’ 참가 후기
기후변화의 위기를 라스베이거스라고 피해 갈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었다. 예년보다 한층 추워진 날씨에 반팔티를 입은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설상가상으로 안개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Okay, let's go. It's freezing.”(좋아, 이제 그만 출발하자. 얼어 죽겠어.)
성조기 모양 속옷만 입은 남성이 빗속에서 거듭 소리를 질렀다. 스타트라인에 선 사회자는 추위에 질린 참가자들의 심정은 모른다는 듯 명랑한 목소리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계속했다.
2023년 2월, 라스베이거스. 연중 다양한 이벤트와 행사가 열리는 다운타운 라스베이거스 이벤트 센터 앞이 출발지였다. 아, 내가 추위와 빗속에서 출발을 기다리던 이곳은 ‘락앤롤 라스베이거스 2023’(Rock 'n' Roll Las Vegas 2023) 현장이다.
코로나19 이후에도 몇 차례 일 때문에 해외를 오간 적은 있지만, 런트립(러닝이 포함된 여행)은 처음이었다. 출발선에 서기 전까지도 오랜만에 하는 해외에서의 러닝에 설레 있었다. 그런데 막상 출발선에서 30~40분 추위와 싸우다 보니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마라톤에서도 루틴은 중요하다. 대회에 나갈 때의 복장, 챙겨가야 하는 장비 같은 것들은 루틴이 한 번 잡히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된다. 이번 락앤롤 러닝의 경우 그런 루틴이 완전 깨진 이후 참가하게 된 것이라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반팔티 위에 겹쳐 입었다가 출발선 앞에서 벗어 허리에 묶어둔 후드가 지나치게 무겁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가장 불편한 건 배번호였다. 선수들의 기록을 측정하고 대회 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마라톤 대회들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배번호를 착용하도록 한다. 보통 국내 대회들은 배번호와 함께 옷핀을 나눠주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락앤롤 런 때는 옷핀을 받지 못 했다. 배번호를 고정할 핀을 미처 챙기지 못 했던 나는 레깅스의 허리 고무줄 안에 대충 배번호를 쑤셔 넣고 있는 상태였다. 한 마디로 굉장히 우스운 몰골이었다는 뜻이다.
드디어 출발을 하란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위 탓에 어느새 다시 입은 후드를 그대로 입고 뛰기 시작했다. 이미 몸이 젖을 대로 젖어서 벗고 허리에 감으면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것 같았다. 허리춤에 넣고 있던 배번호를 후드티 모자에 달린 끈에 매달았다. (이 생각을 하고 스스로가 얼마나 천재처럼 느껴졌는지!) 다만 끈에 매달린 배번호가 뛸 때마다 펄럭이는 걸 막을 길은 없어서 대충 한 손으로 배번호를 잡고 스타트라인을 내달렸다.
락앤롤 라스베이거스는 5km, 10km, 하프로 나뉜다. 라스베이거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각종 호텔들의 네온사인이 즐비한 베가스 스트립은 10km 코스부터 뛸 수 있다. 5km는 다운타운 주위를 달려 이벤트 센터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특히 이번 대회 때는 베가스 스트립을 뛰는 러너들을 곳곳의 전광판으로 생중계해주는 이벤트도 있어서 기왕 라스베이거스까지 갔다면 10km 이상 코스를 선택하는 것이 좋았다.
시작하기 전에는 5km 신청은 조금 아쉽나(비행 일정과 그에 따른 컨디션을 고려한 것이긴 하지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뛰기 시작하니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몸은 속도를 잘 올려주지 못 했고, 1km쯤 지나면 가벼워졌어야 할 다리는 여전히 무거웠다. 속도가 나지 않으니 몸도 잘 데워지지 않고 한기가 지속됐다.
불야성답게 라스베이거스의 밤거리는 무척 화려했다. 거리 곳곳에 내려앉은 형형색색 네온사인의 불빛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뛰었다. ‘왜 이렇게 몸이 안 따라주지’, ‘컨디션이 왜 안 올라오지’ 같은 생각을 백날 해봐야 레이스에는 사실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그냥 멍을 때리고 있는 게 가장 편하다. 러너스하이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뛰는 행위가 너무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위해선 생각을 비우고 그냥 다리를 움직이는 순간들이 필요하다.
‘MOTEL’(모텔)이라고 크게 쓰인 네온사인 현판과 (보통은) 무더운 사막의 기후 속에서 자란 키가 큰 나무들이 달리는 옆으로 쉭쉭 지나갔다. ‘락앤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코스 중간 연주를 하는 록 밴드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풍경과 소리에 조금씩 에너지를 얻었다.
5km의 레이스를 마침내 마치고 다 젖은 몸으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완주 기념 메달과 물, 와인 등을 들고 참가자들이 쉬고 있는 천막 쉼터로 들어와 아무 의자에나 털썩 주저앉았다. 메달 그놈 참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지. 라스베이거스와 락앤롤 감성을 듬뿍 담은 메달을 보니 그래도 참 즐겁고 뿌듯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우버를 불렀는데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하필 난생처음으로 공항에서 사가지고 온 유심(USIM)이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참이었다.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에서는 우버를 잡기 어려워 이동도 여의치 않은 상태였다.
여느 때였다면 해외 러닝을 할 땐 스타트나 피니시라인 근처에 숙소를 잡는다. 이번엔 해외 러닝에 대한 잃어버린 감과 라스베이거스에 다녀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지리를 꽤 안다는 자신감으로 숙소의 위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운타운에서 내가 묵는 호텔이 있는 베가스 스트립의 초입까지는 거리가 상당했다. 이미 무거워진 몸으로, 추위와 어둠을 뚫고 호텔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일단은 걸어보는 수밖에. 대회장에서 나눠준 은박 담요를 둘러매고, 최대한 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메달을 목에 걸고 젖은 라스베이거스의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한참 걷다 한 호텔에 들어가 로비에서 제공하는 무료 와이파이로 우버를 잡았다. 평소였다면 10달러면 갈 거리인데 예상 요금이 35달러나 됐다. 그나마도 잡힌 게 감사했다. 간신히 잡힌 우버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보송보송한 시트의 감촉이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대회장에서 받은 캔와인을 따 마시며 한참 동안 그 순간을 즐겼다.
루틴. 가장 시급한 건 역시 루틴을 찾는 일이었다. 코로나19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긴 했지만, 다시 대회용 루틴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루틴이 잡히면 모든 일이 수월해진다. 뛰기 싫다는 마음을 이기고 나가게 하는 힘 역시 대부분 루틴에서 나온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것이다. 뛰고 싶기 때문이다.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