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러닝을 사랑하는 이유
다른 많은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기자 역시 결과로 평가받는다. “취재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반드시, 데스크에게 제출해야 한다. 최선을 핑계로 계속 취재에서 물을 먹는다면 점잖게는 데스크의 한숨이, 심하게는 “일을 하는 거냐 마는 거냐”는 평가가 날아올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물론 늘 시험을 보기 전에 최선을 다했던 건 아니지만, 드물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생각했던 때에도 “최선을 다한 데 의의가 있다”, “정말 잘했다”는 말을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대충 벼락치기를 했더라도 1등을 하면 칭찬받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다음 번에 잘하라”는 말을 들었다.
살다 보니 세상 일이 다 그랬다. ‘참가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지만 세상은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그 가운데서도 금메달을 딴 이들에게 특히 더 관심을 줬다. 참가하는 의의를 남긴 다른 수많은 선수들의 이름은 쉽게 잊혔다. 연금, 방송 출연 기회 등 많은 혜택들은 승자가 독식했다. 물론 비단 우리 시대 일만은 아니다. 그러니 아바도 ‘위너 테이크스 잇 올’(The Winner Takes It All)에서 "이긴 사람만이 모든 걸 다 갖는다"고 노래했겠지.
하지만 역시 살다 보니 최선을 다한다는 게 참 중요한 것 같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눈으로 보이고 수치로 잴 수는 없더라도 분명히 삶의 태도를 바꾼다. 어차피 1등이 아니면 주목받지 못 하는 세상에서 1등을 못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루하루 쌓여 위대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광경을 종종 목격한다. 누군가 매일 쓴 일기가 책이 되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임했던 세계일주, 혹은 국토횡단의 기록이 영상 등의 콘텐츠로 재탄생돼 많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내게 러닝은 최선을 다하는 것, 참가하는 것의 의의를 깨닫게 해주는 활동이다. 2019년 여름 처음으로 러닝을 시작한 이래 나는 단 한 번도 더 빨리 뛰지 못하는 것으로 나를 채찍질한 적이 없다. 1등을 목표로 한 적도 없다. (물론 어차피 내겐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계산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다만 나는 늘 완주를 목표로 했다. 시간제한이 있는 경기라면 그 시간 내에 들어오는 것 정도가 목표였다. 평소에 연습을 강도 높게 하지 않더라도, 대회에 꾸준히 나가는 것만으로도 페이스는 서서히 상승했다. 주로에서 몸이 가볍게 느껴지거나, 그래서 지난번 대회 때보다 기록이 향상하면 완주의 기쁨에 또 다른 보람이 조금 더 더해졌다. 그런 날엔 왠지 대회 후에 하는 맥주 한 잔, 맛있는 음식 한 그릇이 스스로에게 주는 또 하나의 메달처럼 느껴지곤 했다.
꼭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내가 가진 것을 최대한 쏟아부어 무언가를 이뤘을 때의 기분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그 시간들은 자신의 안에 차곡차곡 쌓여 훗날 기억할 수 있는 '나의 삶'을 형성한다. 5km의 짧은 코스든 42.195km를 넘는 울트라 마라톤의 코스든 쉬운 레이스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어느 순간엔 고비가 왔고, 어느 순간엔 다리를 그만 움직이고 싶어졌다. 당연하세도 그런 순간을 극복해야만 완주가 가능하다.
지금껏 모은 완주 메달은 그 자체로 나의 성취다. 힘든 시간을 넘어서지 못 했다면 손에 쥘 수 없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방 곳곳에 있는 완주 메달들을 보며 오늘도 위안을 얻는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적어도 나는 저렇게 여러 번, 힘듦을 극복하고 피니시 라인을 밟았다. ‘열심히 해봤자 1등은 정해져 있어’, ‘최선보다 중요한 건 결과야’라는 사회의 시선을 어떨 땐 내 메달들이 비웃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메달만 바라봐도 떠오르는 그날 그 주로에서의 느낌. 내 최선이 그렇게 동그랗고 빛나는 무언가로 남았다면 된 것이다. 꼴등으로 들어와도 완주만 했다면 주어지는 러닝 메달은 참가와 최선의 의의를 새삼 되새기게 해주고, 그것이 느림보 러너인 내가 달리기를 사랑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