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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진영 Mar 17. 2021

나는 미국 사회의 필수인력이다.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1차 접종 완료.

한 사회의 '필수인력'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직업을 떠올리는가?



장면 1. 비숙련직 Unskilled labor/worker과 미국 이민 비자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스티븐 연)은 10년간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한다. 그런 직업도 있는가 싶겠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직종을 비숙련직 Unskilled labor/worker이라고 한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민 1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종은 상대적으로 영어 원어민들이 꺼리는 분야이며, 그런 곳의 대부분은 학력이나 경력, 전문 기술이 요구되지 않는 비숙련직이다. 대화가 거의 필요 없고, 단순 반복적인 일이 뭐가 있을까? 대표적으로 농장 노동자, 청소 노동자, 식료품 점원, 캐셔 등을 예로 든다. 

비숙련자들이 취득할 수 있는 미국 취업 영주권으로 자주 회자되는 작업장이 있다. 바로 닭공장이다. 닭을 씻어서 부위별로 해체해서 포장하기까지 전 과정을 처리하는 공장으로 일의 강도가 매우 높고, 작업장의 온도를 낮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환경이 매우 열악하기로 알려져 있어 현지인들은 피하는 일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기업들은 미국 가정의 식탁을 책임지는 필수 업종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인력의 수급난을 겪게 된다. 미국 연방 노동부는 이를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비숙련 이민 비자-취업영주권과 연계하여 관련 기업이 외국인 노동자를 채용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만들었다. 이러한 기업은 닭공장뿐만 아니라, 소시지 공장, 소 도축장 등 대부분의 대형 육가공업체들과 청소용역 업체 등이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 취업영주권, 비숙련 이민 비자 등을 미끼로 사기행각도 많고, 이들 공장의 근로조건이 매우 열악하여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장면 2.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정의한 미국의 필수인력

"우리는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아무 일 없을 것이다." 2020년 1월 22일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CNBC의 질문에 호기롭게 큰소리친다. 두 달 후, 미국은 전 세계 코로나바이러스 누적 확진자 수 1위의 자리를 거머쥐며 처참하게 주저앉고, 연방정부의 안일한 대처를 경계하며 각 주정부 단위로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속도를 줄이기 위해 행정명령을 발령한다.

2020년 3월 19일, 캘리포니아주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필수 인력을 제외한 모든 직장인에 대해 100% 재택근무를 의무화하는 재택 명령/자택 대피령 Stay-at-Home Order을 발령한다. 이 명령에 따르면 '필수 활동 및 필수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추가적인 전파를 예방하기 위하여 모든 지역주민들은 집에 머물러야 한다. 

그렇다면 필수 활동, 필수 사업장이란 어떤 곳일까? 사이버 보안& 사회기반시설 보완을 담당하고 있는 미국 정부 산하기관 CISA(Cybersecurity & Infrastructure Security Agency)는 필수 중요 사회기반시설 인력을 다음의 16개 부문으로 나누어 정의하고 있다. 

▸화학 Chemical ▸통신 Communications ▸상업시설 Commercial Facilities ▸중요 제조 Critical Manufacturing ▸댐 Dams ▸방위산업기지 Defense Industrial Base ▸응급서비스 Emergency Services ▸에너지 Eergy ▸금융 Financial ▸식품 및 농업 Food & Agriculture ▸정부 시설 Government Facilities ▸의료 및 공중보건 Healthcare & Public Health ▸정보기술 Information Technology ▸원자력 원자로, 물질 및 폐기물 Nuclear Reactors, Materials & Waste ▸교통 시스템 Transportations Systems ▸상하수도 시설 Water 
코비드-19 중 필수 중요 사회기반시설 인력 (출처 : www.cisa.gov)



장면 3. 팬데믹으로 사회가 멈췄을 때,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들

팬데믹으로 미국 경제가 휘청휘청 거리는 것을 나 또한 몸으로 겪고 있던 중, 간단명료하면서도 가슴 한편에 확 꽂히는 해시태그 #ImmigrantsAreEssential와 예술프로젝트 <이민자들은 필수적이다 Immigrants Are Essential>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의 비영리기관인 Resilience Force와 국립이민법센터 National Immigration Law Center가 진행하는 정치적 예술프로젝트로, '미국에 이민자들이 없다면, 미국에는 필수적인 노동력이 없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미국 사회가 그동안 비숙련/미숙련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얼마나 과소평가해 왔는지, 코로나바이러스로 공중 보건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기초적인 사회안전망과 경제가 돌아가기 위해 어떤 직종이 팬데믹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는지를 되짚어주는 프로젝트이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간호 및 간병인력, 식품 또는 음료제품을 판매하는 식료품점, 약국, 편의점의 인력, 소포와 음식물을 배달하고 패스트푸드 운영을 지원하는 인력, 거리를 청소하는 인력, 미국 전역의 식품 공급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농장 인력 등 이들 모두가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인력이라는 점이다. 2020년 5월 1일, 국제 노동자의 날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팬데믹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이민자들을 재조명하고 이들의 삶과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예술가들이 함께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예술가와 예술작품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한 사회를 보다 건강하고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예술작업,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가치를 확연하게 드러나게 만드는 예술작업, 약자들의 편에 선 정치적 구호가 예술작업과 만나 어떻게 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 예술작업이 갖는 가치와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면 4.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접종 시작과 우선순위

2020년 12월 8일, 세계 최초로 화이자 백신 접종을 시작한 영국의 첫 백신 접종자는 90세의 여성이었다. 영국은 양로원 거주자와 종사자 등 주로 나이를 기준으로 접종 순서를 정했고, 이를 근거로 첫 접종자를 선정한 것이다. 

2020년 12월 14일, 미국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첫 백신 접종자는 '이민자 출신 흑인 여성 간호사'였는데, 미국은 병원/보건소/약국 등 보건의료시설 종사자들을 접종 우선순위 1그룹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흑인과 남미의 이민자 사회의 코로나바이러스 피해가 극심했고, 이 집단 내에서 백신에 대한 불신이 높아 이들에게 백신의 안전성을 보여주고 싶어서 흑인 여성이 선정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은 의료진과 장기 요양 시설 거주자를 최우선 접종 대상으로 정했다. 그다음으로 필수 사회기반시설 인력과 75세 이상 고령자이다. 필수 사회기반시설 인력에는 식품과 농업 인력, 학교와 보육원 인력, 경찰, 소방관 등 응급서비스 인력이 포함된다. 

2021년 3월 15일 기준, 캘리포니아 백신 접종이 가능한 인력은 다음과 같다.

단계 1A 
    - 의료 종사자 healthcare workers 
    - 장기요양시설 거주자 people living long-term care facilities
단계 1B 
     - 65세 이상 캘리포니아 주민
    - 농업 및 식품 Agriculture and food
     - 교육 및 보육 Education and childcare
     - 응급 서비스 Emergency services




나는 캘리포니아, 한 지역의 작은 식당에서 서버로 일하고 있다. 2020년 3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친 강력한 자택 대피령 Stay-at-Home Order으로 식당은 실내에서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음식을 포장 판매하는 투고 togo 주문이라도 받고자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나 식당의 주요 메뉴는 투고 주문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당 매출 규모는 팬데믹 이후 1/10 수준으로 떨어졌다. 식당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비용도 나오지 않아, 결국 식당 문을 일시적으로 닫게 되었다. 나는 백수가 되었다. 2020년은 백수와 필수 노동자 사이를 오가며 보낸 한 해였다.  


내가 일하는 식당뿐만이 아니다. 미국 전역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고 무려 1년이나 팬데믹이 지속되면서, 대부분의 주 정부에서는 바이러스 전염의 우려가 크기 때문에 술집과 식당의 실내 영업을 금지하고 투고와 배달만 허용했다. 그로 인해 미국 외식업계와 종사자들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2020년 내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여파로 인해 영업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하는 식당 소식을 계속 접했다. CNN 비즈니스는 전체 식당의 17%에 달하는 약 11만 곳이 2020년에 영구적으로 문을 닫았다고 보도했다. 


한편, 1년에 걸쳐 이루어진 행정명령으로 인해 생존의 위협에 놓인 식당주들은 계속 순응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목소리를 높여 싸워야 한다는 집단적인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지역 정부가 이런 식의 행정명령을 고수한다면 식당들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고, 식당의 수많은 종업원들도 일자리를 잃게 되고, 결국은 지역 경제 전체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요식업협회가 지역 카운티 보건국을 상대로 식당의 실내 및 실외 영업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이 비상 지휘권 남용이라고 고소한 사례도 있다. 


그렇다, 지역경제의 문제는 곧 국가의 위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상권과 외식업계를 살리기 위한 정부의 부양책이나 지원 프로그램이 다방면에 걸쳐 가동되고 있다. 식품/식당 종사자들을 백신 접종 우선순위에 배치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2021년 3월 17일부터 내가 일하는 식당은 전체 식당 수용 인원의 25%에 불가하지만 다시 실내 영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작은 식당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이지만,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필수인력인 나는 지난 11일,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1차 접종을 마쳤다.


I'm ready to roll up my slee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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