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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10kg 찌게 만든 주범 세 가지

나는 대체 뭐가 그리 맛있었을까

by 요나

아프리카에서 돌아와 몸무게를 재어보니 무려 10킬로가 쪄있었다. 보통 고생을 하면 살이 빠진다던데 겉으로는 너무 잘 지내다가 온 거 같이 보였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데 티가 안 나다니! 그 와중에 피부는 태닝이 고루고루 잘되어서 하와이 같은 휴양지에 다녀온 사람처럼 보였다. 억울해!


언제 이렇게 됐는지 아루샤에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키가 큰 편이지만 아루샤에서는 마사이족들이 거리를 활보하니 내가 딱히 커 보이지도 않았고 체격도 고만고만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판판하게 보여서 살이 빠졌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차가 진흙탕에 빠져서 밀어야 했을 때 나도 도우려고 차 꽁무니에 다가서면 운전수들은 하나같이 화들짝 놀라며 그럴 필요 없다고 진흙 튀니까 저 멀리 가있으라고 만류했다. 내가 너무 fragile 해보여서 그렇다나? 자기들이 밀 테니 시동이나 걸어달라고 했다. 이런 얘기를 듣다가 한국에 왔더니 거인이 되어버려 적잖이 당황했다.


난 대체 뭐가 그렇게 맛있었던 걸까? 날 이렇게 만든 주범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깨강정!



탄자니아에서 가게는 세 종류로 나뉜다. 현지인이 하는 가게, 인도사람이 하는 가게, 그 외 외국인이 하는 가게. 이 중에서 인도사람이 하는 가게에 가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깨강정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깨강정 하고 모양은 다르지만 재료가 같아 당연하게도 맛이 똑같다. 살짝 덜 고소하긴 하다. 완전 밀봉이 되어있는 포장이 아니다 보니 꼬수운 냄새가 다 빠져나가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탄자니아의 깨가 좀 더 작아서 그런가? 빠삭빠삭하게 톡톡 씹히는 느낌이 별로 안 든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끊임없이 들어간다. 어쩌면 한국에서 처럼 고르고 매끈한 깨가 아니고 곳곳에 깨진 깨가 같이 들어가서 더 입안에서 잘 부서지는 바람에 더 빠르게 많이 먹을 수 있던 걸 지도..


햇빛 아래 잠시 놓아두면 깨강정이 아주 딱딱하지 않고 살짝 녹아있는 상태가 된다. 손으로 양끝을 잡고 움직이면 참깨들이 내 손이 움직이는대로 울룽불룽하게 물결친다. 이렇게 살짝 말랑해지면 먹기가 더 좋다. 입안에서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랄까.


가격도 엄청 싸다. 손크기만 한 판판한 네모 모양의 깨강정이 단돈 2000실링. 1000원 남짓한 건데 이래서 뭐 남기는 남을까? 하지만 장사에 있어서만은 절대 손해보지 않는 표독한 인도인이 하는 가게라면 돈이 되니 파는 것일 거다. 탄자니아는 참깨 생산국이기도 하다는데 그래서 참깨가 아주 싸니 이득을 많이 보는 걸 지도 모른다.



깨강정은 모든 인도인 슈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봤을 때 바로 사야만 한다. 아루샤의 가게들은 현지 전력이 불안정하다 보니 재고를 많이 쌓아두지 않는다. 한마디로 재고관리의 개념이 없다. 있으면 팔고 없으면 어쩔 수 없고... 언제 다시 들어오는지 어느 정도의 양이 들어오는지 물어봐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한다. 손님 유치나 단골 확보를 위해 구해오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렇게 일정한 입고 시기가 없다 보니 항상 사던걸 사러 가도 없을 때가 많다. 공산품도 이런데 핸드메이드 먹거리는 오죽할까. 언제 또 살 수 있을지 모르니 아껴서 먹으려고 하지만 절대 될 리가 없다.


선반에 아름답게 놓여있는 깨강정들을 보며 신중하게 두께를 가늠한다. 수제로 만드는 거라 면적은 같아도 두께가 다른 경우가 많다. 오늘은 꼭 하나만 사먹겠다면서 너무 많이 먹는 거 같아 안되겠다고 말하면서 꼭 더 두꺼운 걸 고르는 내 마음은 뭘까..?


가게에서 깨강정을 팔면 높은 확률로 땅콩강정을 같이 판다. 하지만 난 땅콩강정 따위에 한눈 팔지 않고 항상 깨강정만을 골랐다. 이렇게나 좋아했는데 나중에서야 이 깨강정이 칼로리가 매우 높다는 걸 알았다. 밥이랑 비교하면 같은 양 대비 3~4배 정도 된다고 한다. 깨강정을 밥공기 하나만큼 먹는 일은 드물겠지만 아침에 한판, 저녁에 한판을 먹으면 밥 반공기 정도는 될 거고 밥 한 공기가 300칼로리 정도 되니까... 아니다, 여기서 계산을 멈추자. 맛있었으면 됐지.




두 번째, 수입과자!



아루샤는 생각보다 물가가 높다. 도시 내에서 생산하는 물건이 거의 없어서 그렇다. 아루샤 내에는 맥주 공장, 타이어 공장이 있는데 그와중에 타이어 공장은 땅문제로 가동하지 않은지 오래라고 하고, 가공식품 공장은 유일하게 주스 공장이 하나 있다. 아루샤에서 파는 물건은 거의 다 시외에서 오거나 해외에서 들여온다. 이국적인걸 바라고 이런 슈퍼에 가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탄자니아에서 만든 제품은 정말 적고 대부분이 영국제품이다. 탄자니아가 몇십 년 동안 영국의 통치하에 있어서 그런가 수입이 활발한 거 같다.


촬영에 가면 맨날 똑같은 소스에 내용물만 바뀌는 반찬을 먹는다. 나중엔 정말 너무 물린다. 그래서 촬영지에서 탈출(!)해서 빌라지 슈퍼마켓 같은 외국인이 하는 가게에 가면 눈이 돌아간다. 작정하고 인공적이고 현대적이고 자극적인 도시의 맛을 느껴보고 싶은 나에게 이런 곳은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신이 주신 세계과자점이랄까. 일반적으로는 현지 시장을 많이 가지만 촬영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특히나 외국인 가게를 자주 간다. 가야만한다.



그리고 도시에서 촬영본을 촬영본을 정리하거나 가편집을 할 때면 당 떨어진다는 핑계로 또 외국인 슈퍼를 간다. 역시나 영국 브랜드 과자가 많긴 하지만 남아공 제품도 있고 신기하게 아랍에미레이트 과자나 말레이시아 과자도 있다. 기왕이면 못 먹어본 과자나 초콜릿도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하나둘씩 처음 본 브랜드를 고르곤 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원래 좋아하던 맛도 사고 새로운 맛도 사고 몸무게 2배 이벤트다. 당시에는 뇌가 열심히 소화시킨다고 믿었지만 아니었나 보다.


어느 나라든 슈퍼마켓은 구경만 해도 재밌었지만 또 다른 재미는 한국 과자와 같은 맛의 과자를 찾아보는 것에 있었다. 학교매점에서 사 먹던 러스크만큼 달달한 밀크러스크, 빅파이하고 맛이 똑같은 손바닥만 한 초콜릿과자, 치토스 맛하고 똑같은 오징어링 과자.. 한국 생각이 날 때면 이런 과자를 골라 먹으며 마음을 달래 보기도 했었다.





마지막, 칩시마야이!



절대 맥주와 같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 1위, 칩시마야이다. 맥주 한 병 마실걸 세 병 마시게 만드는 마성의 메뉴다. 칩시마야이라는 메뉴 이름은 말 그대로 감자칩(칩시)과 계란(마야이)이라는 뜻이다. 탄자니아에는 영어 단어 끝에 '이'를 붙여서 현지화된 단어들이 많다. 그래서 감자튀김은 '포테이토 칩스(potato chips) + 이(i) = 칩시(chipsi)' 이렇게 변해서 칩시라고 불린다. 이처럼 스푼은 스푸니, 폴리스는 폴리시, 오피스는 오피시다. 만약 탄자니아에 갔는데 스와힐리어 단어를 모른다면 영어단어에 '이'를 붙여보시라.


칩시마야이는 계란물에 감자튀김을 올려서 부침개처럼 만든 음식이다. 맥도날드 감자튀김처럼 얇고 긴 게 아닌 감자 껍질을 벗기고 바로 쑹덩쑹덩 잘라 두툼한 감자튀김은 탄자니아 그 어느 음식점에 가도 있는 메뉴다. 달걀은 탄자니아 그 어느 가게를 가도 파는 식료품이다. 가장 흔한 것들로 만들어진 가장 맛있는 음식이 칩시마야이다. 칩시마야이의 매력은 촉촉함에 있다. 부침개는 모쪼록 얇고 빠삭해야 맛있지만 이건 촉촉을 넘어서 약간 눅눅하다고 느낄 때가 제일 맛있다. 생각해 보면 부침개보다는 계란말이에 가까운 거 같기도 하다. 탄산 가득하게 톡 쏘는 맥주와 진짜 잘 어울린다. 한번 튀겼다가 계란물에 담겨 겉이 촉촉해진 감자튀김이랑 아낌없이 뿌린 기름에 자글자글 익힌 계란의 보들보들함이 정말 맥주와 환상의 조합이다.


보통 곁들여 주는 나이프로 착착 잘라먹어도 맛있지만 포크로 되는대로 잘라서 먹는 게 좀 더 느낌이 있다. 케찹도 꼭 현지 케찹으로 먹어야 한다. 하겐다즈 케찹 같은 고급제품과 먹으면 칩시마야이 특유의 고소함이 다 사라지는 거 같다. 조금만 더 묽었으면 토마토주스라고 해도 될 법한 현지 케찹이 딱이다.



내가 먹은 가장 맛있는 칩시마야이는 킬리만자로에서 먹은 칩시마야이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 다른 사람들은 그냥 스키 타듯이 쭉쭉 미끄러지면서 내려갔는데 나는 겁이 많아서 그걸 한걸음 한걸음 걸어내려 가느라 정말 오래 걸렸다. 이미 너무나 뒤처져서 우리 가이드 빼고는 촬영팀도 안 보이고 다른 등산객도 다 내려가서 내 뒤에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도 안 나고 점점 지쳐 갔다. 이런 나를 정신 차리고 걷게 하려고 가이드가 쉼 없이 말을 걸었다. 별의별 질문을 많이 했는데 그중 하나가 저녁으로 뭘 먹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다른 질문엔 다 멍하니 있다가 그 질문을 들으니 내가 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이역만리에서 이러고 있나 갑자기 서러워졌다. 먹고 싶은 게 있긴커녕 잠이나 자고 싶은데 왜 그 순간에 칩시마야이가 생각났는지.. 어차피 부대찌개가 먹고 싶어, 감자탕이 먹고 싶어, 해봤자 일 테니 체념하는 마음을 비집고 그나마 좋아하는 현지 음식이 떠오른 거 같다.


가이드는 네가 말한 메뉴를 꼭 만들어주겠다고 캠프에 빨리 가자고 말했지만 난 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겨우 캠프에 도착해서는 텐트 안에서 벌러덩 누워 못다 한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는데 저녁에 식당 텐트로 가보니 칩시마야이가 있었다! 내가 먹고 싶은 거 해준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해주다니 너무 감동했다. 진심 어린 말을 나는 왜 안 믿었나, 내가 뭐라고 이렇게 해주나 하는 미안한 생각도 들어 울컥했다. 그날은 칩시마야 이를 더 꼭꼭 씹어먹었다. 정말 눈물 없이 먹을 수 없는 칩시마야이였고 최고로 맛있었다.






사실 따져보면 세 가지 음식은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깨강정은 한국이 훨씬 종류도 많고 먹기도 간편하게 되어있다. 수입과자도 그냥 쿠팡에서 시키면 다음날 새벽에 온다. 칩시마야이도 탄자니아에서만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먹었으면 이만큼 나에게 따듯하게 기억되었을까. 너무 건강해진 내 모습에 가서 고생도 안 한거 같고 에버랜드 사파리 가서 놀다 온 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기왕에 살이 찔 거면 맛있는 걸 먹고 행복하게 찌는 게 좋은 거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 10kg는 행복의 무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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