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위에 펼쳐진 꽃의 평원 '키툴로'
높은 구릉지대에 있는 키툴로 국립공원은 꽃으로만 승부를 보는 곳이다. 오른쪽을 봐도 꽃, 왼쪽을 봐도 꽃, 발아래를 봐도 꽃, 저 멀리를 봐도 꽃, 온통 꽃이다. 솔직히 관광객의 시선으로만 보면 그 흔한(?) 사자 한 마리 없는 국립공원이라 그다지 큰 매력이 없는 건 사실이다. 아프리카까지 와서 야생동물 대신 꽃만 보고 올 사람 있을까?
키툴로는 깡시골이라 다른 국립공원을 방문한 김에 들리기도 애매하고 규모도 작다. 가장 가까운 국립공원이 루아하 국립공원인데, 탄자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국립공원인 루아하를 등지고 굳이 키툴로에 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만큼 루아하에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변변찮은 숙소도, 음식점도 없는 곳이라 누군가가 키툴로에 온다고 하면 나라도 말릴 거 같다. 일단 세렝게티 보고 오라고, 아니면 근처의 루아하를 보러 가라고.
키툴로 공원은 가는 길도 참 쉽지 않다. 내가 사는 아루샤에서부터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오다가 하룻밤을 자고 다시 동쪽으로 일반도로를 타고 달린 뒤 오른편의 산을 타고 곡예하듯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 아슬아슬한 비탈길은 난간도 설치되지 않아 언제 차가 굴러 떨어져도 놀랍지 않을 정도다. 4륜구동 랜드로버로 세렝게티를 자기 집 안방처럼 다니던 베테랑 운전수도 코너마다 끙끙댔다.
한참을 빙글빙글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트럭을 마주했다. 여길 어떻게 내려오려고 하는 거지? 아니, 그전에 대체 어떻게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잘 닦인 산길도 아니고 곳곳이 파여있고 모래나 자갈이 섞여있어 미끄러운데 말이다. 한쪽에 무게가 쏠려 바퀴가 미끄러지지 않게 벽돌로 이곳저곳 고이면서 조금씩 조금씩 운전대를 움직여 길을 따라 내려오는 트럭을 보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들에겐 너무 익숙해 보이는 장면이었다. 무모한 걸까, 영리한 걸까?
심지어는 버스를 마주하기도 했다! 이런 길을 오르고 내리는 버스라니. 위험하기도 하고 이걸 타고 다니는 사람이나 몰고 다니는 사람이나 둘 다 제정신은 아닌 거 같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걸 어떻게.. 하지만 비탈길을 다 올라가서 고원 마을을 만난 후로는 납득됐다. 산등성이를 따라 쭉 달려야 마지막 주유소가 있는 마탐바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 또 한참을 올라야 키툴로 국립공원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 나온다. 일반 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산길까지 나오기도 이렇게 힘든데 버스마저 없었으면 정말 고립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실 난 동물보다 꽃 찍는 걸 훨씬 좋아한다. 동물을 찍어야만 했을 때는 실패할까 봐 두렵고 무서운 적이 많았다. 한번 놓치면 끝이라 그런지 부담이 진짜 크다. 그래서 차라리 동물이 근처에 오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다. 실패하는 거보다 허탕을 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면 참았던 눈물이 흐를까 봐 찍을 거 하나 없는데도 한참을 그렇게 멈춰있곤 했다. 속상한 날들이 많았다.
그런데 키툴로는 꽃뿐이라니! 너무 기뻤다. 유유자적 꽃을 찍을 생각에 신났고 평소와는 달리 아루샤를 떠날 때도 매우 설렜다. 보통은 촬영을 앞두고 잔뜩 긴장하는데 이번엔 마음이 편했다. 꽃밖에 없으니 별일도 없겠지?
하지만 첫 촬영부터 내 예상은 산산조각 났다. 이 국립공원이 절대 만만치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사전 답사 때 분명 수백 송이 꽃이 쫘악 펼쳐져 있는 걸 봤는데 다음날 새벽에 가니 꽃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풀밭이었다. 잘못 찾아온 줄 알고 같이 온 운전수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다. 여기가 어제 거기가 맞아? 오늘 다시 올 거라고 한 곳 맞아? 내가 기억해 달라고 한 곳 맞아? 운전수는 여기 있는 이 나무 두 그루와 저 쪽에 있는 바위로 기억해 놨다고 분명히 어제 거기가 맞다고 했다. 근데 우리가 어제 봤던 꽃이 하나도 없지 않냐 하니 자신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제 그렇게 많았던 꽃이 대체 어디 있지?!
넓은 꽃밭을 배경으로 일출 장면을 찍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급히 차에 올라 근처에 있던 다른 평지로 이동해 카메라를 세팅하고 일출 타임랩스를 찍었다. 화사한 색은 없고 풀만 있어서 별로였지만 이슬이 반짝이는 장면이 담겼으니 중박은 쳤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침 촬영을 마치고 가이드가 키툴로에만 있는 난초가 많은 곳을 알려준다길래 다시 길을 나섰다. 달리다 보니 어제와 비슷한 꽃밭이 나왔다. 아니, 그런데 익숙한 나무와 저 돌의 위치.. 오늘 새벽에 꽃이 없어졌다고 난리 친 그곳이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가까이 다가가보니 어제 본 거처럼 꽃잎을 손바닥처럼 활짝 펼친 꽃도 있었지만 아직 반밖에 펼치지 못해 나팔꽃 같아 보이는 꽃도 있었고 꽃봉오리 모양인 것도 곳곳에 많았다. 알고 보니 새벽에는 어둡고 추워서 꽃잎이 돌돌 말려있던 거였다. 해가 점점 올라오자 밤새 움추러들어있던 꽃들이 계속해서 하나둘씩 꽃잎을 펼쳤다. 어이없는 마음은 뒤로하고 다시 한참 동안 촬영 계획을 세우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비로소 어제 봤던 꽃밭이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다음날에 다시 찾아와 타임랩스를 설치했다. 예상대로 꽃잎이 펼쳐지며 내가 바랬던 꽃밭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쁨의 순간도 잠시, 햇볕에 달궈진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바람에 꽃들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날도 촬영은 실패했다. 바람을 막으면서도 카메라에 안 걸리고 그림자도 지지 않게 서있는 건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지형에 익숙해지자 바람의 영향은 잘 안 받지만 햇빛은 듬뿍 들어오는 고랑 같은 부분을 찾아 안정적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키툴로의 구릉지대에 넓게 펼쳐진 꽃밭을 눈에 가득 담고 앉아있으면 세렝게티의 초원과는 또 다른 기분이 든다. 지평선이 너무 멀고 아득해 거리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세렝게티의 초원과는 달리, 키툴로의 구릉지대는 완만한 곡선을 실타래처럼 구비구비 펼쳐 놓았다. 간혹 가다 한 그루씩 있는 나무가 이정표처럼 있어 너무 넓고 멀어 갈 곳을 잃은 마음을 안심시켜 줬다. 선명한 구름 그림자가 능선을 어루만지며 넘어가면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좋았다. 비록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꽃밭을 나와 진흙길에 쭈그리고 앉아있을지언정 마음은 풍요로웠다.
넓은 꽃밭도 좋고 개울가를 감싼 작은 꽃밭도 너무 예뻤다. 계단처럼 내려오는 들꽃 밭에 조심스럽게 굽이굽이 돌아가는 개울물이 또로롱거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마치 동화 속의 풍경 같다. 어디선가 난쟁이가 걸어 나오거나 하늘하늘한 꽃잎사이로 요정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고 바로 '하바리?'하고 인사할 수 있을 듯했다.
키툴로 국립공원은 일본이 투자해서 만들어진 국립공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지 가이드나 운전수들에게 들은 바로는 키툴로 고원 아래에 많은 자원이 매장되어 있고, 일본이 나중에 그걸 개발하려고 미리 국립공원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먼저 채굴할 수 없게 만든 거라고 한다. 이 자원은 천연가스라는 얘기도 있고 희귀 광물이라는 소리도 있다.
한번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는데 그걸 다시 취소하고 개발하는 게 쉽나?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본 자본이라면 어쩌면 그럴 수 있단 생각도 들고, 탄자니아가 워낙 부정부패가 심한 나라니까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현지인들이 하나같이 입모아 같은 말을 하니 뭐가 뭔진 몰라도 일본과 관련이 있는 거 같다. 가이드도 말해주기를 키툴로 국립공원 방문객은 일본인이 많다고 하는데 이것도 연관 있는 게 아닐까?
게다가 키툴로는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다른 국립공원들과는 다른 면이 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전신주가 있고 게이트에서 바로 연결된 길은 비포장 도로이지만 국립공원 안에 있는 길 치고는 제법 잘 닦여있다. 이 길은 오래전부터 마을주민들이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통행을 막으면 공원밖으로 멀리 돌아가야만 해서 다른 도시에 가는 것도 어려워져 막을 수 없다고 한다. 밤낮으로 길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어 게이트도 24시간 열려있었다. 한 번은 게이트 주변에서 별을 찍기 위해 밤새 카메라를 돌려놨는데 그 길을 오가는 오토바이 불빛에 타임랩스 촬영을 망치기도 했다. 이렇듯 이미 전기도 쓸 수 있고 게이트부터 다른 마을까지 잘 연결되어 있으니 개발을 시작한다면 다른 곳보다 쉬울 것이다.
공원 아래에 묻힌 광물을 캐게 되면 위에 있던 내가 본 아름다운 꽃들은 어떻게 될까. 찾는 관광객도 별로 없는 곳이니 없어진다고 해도 슬퍼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 같다. 탄자니아 국립공원을 찾는 관광객이 줄어들게 된다고 해도 전체 비율로 따지면 아주 조금일 것이다. 하지만 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단지 희귀한 꽃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고원지대에 넓게 펼쳐져 있는 거대한 꽃밭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려면 국립공원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거 같은데 말이다. 키툴로 아래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는 여전히 비밀에 부쳐있지만 그걸로 인해서 구름 위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꽃밭, 스와힐리어로 '부스타니 야 뭉구', 신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이 파괴된다면 너무 안타까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