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코뿔소? 제일 위협적으로 느껴진 건 어떤 동물일까
"사자가 물지는 않아?"
탄자니아에서 야생동물 촬영을 한다고 하면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아쉽게도(?) 아직 물린 적은 없다. 사실 세렝게티 사자는 인간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우리를 한 명 한 명 개별 개체로 생각하기보다는 우리가 타고 있는 사파리 차량 전체를 하나로 본다.
사자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아마도 덩치는 큰데 잘 움직이지는 못하며(사자를 한번 발견하면 멈추고 사자가 이동하면 뒤뚱뒤뚱 조금씩 따라가니까), 종종 짧은 촉수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는(사파리 차량 뚜껑을 열고 고개를 내밀거나 카메라를 든 팔을 뻗거나 하니까), 그러면서도 좀 시끄럽고(낡은 사파리 차량이 내는 소리는 조용한 초원에서 엄청 도드라진다), 별로 좋은 냄새는 안 나지만 선은 지키는(도시의 냄새를 가득 담고 정해진 길을 따라 운전하니까), 그런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일 것이다.
국립공원 내에서 사파리 차량은 정해진 길을 따라 한 줄로 다녀야 한다. 길을 벗어나거나 이중주차를 하면 벌금을 낸다. 하지만 일반 사파리 여행팀과는 달리 촬영팀은 '오프로드' 허가를 받으면 길이 없는 곳도 다 들어갈 수 있다.
처음 오프로드 촬영을 갔을 때 내심 아닌 척했지만 엄청 긴장했다. 잘 닦인 흙길을 달릴 때도 차가 엄청 흔들렸는데 울퉁불퉁한 풀밭을 달리니 차가 위아래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렇게 시끄럽게 동물들의 공간으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 갑자기 보호막이 사라진 거 같았다. 평소에는 우리 주변에 다른 차들도 많지만, 딸랑 우리만 풀밭 안에 있으니 눈앞에 보이는 모든 동물들이 전부 우릴 공격할 거 같아 무서웠다. 겁도 없이 야생의 사자에게 내 발로 가까이 가다니. 촬영할 때는 문도 한 짝 떼고, 창문은 다 열어 놓고, 차 뚜껑도 열어 놓는데.. 진짜 쉽게 공격당할 수 있는 상황 아닌가?!
벌러덩 누워있기만 해서 지루하게 보이던 사자나 치타가 다르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나에게 달려올 거 같이 느껴졌다. 지금은 우리 차뿐인데... 우리한테 오면 내가 물릴 확률은 4분의 1...? 이기적이지만 나 먼저 물리진 않으려고 사자에서 가장 먼 창문에 찰싹 붙어있었던 건 비밀이다.
이렇게 오프로드 촬영을 하면 야생동물에 가까이 갈 수 있으니 더 좋은 장면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프로드 촬영은 실제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확실히 기회가 늘어나는 건 맞지만 가까이 간다고 해서 무조건 멋진 장면을 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방해만 할 수도 있다. 촬영팀은 최대한 동물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고 노력하고,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런 속도 모르고 사자나 치타는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 차량 그늘로 와서 철퍼덕 앉아버린다. 차옆에 붙어 앉아 아예 찍을 수도 없다. 이렇게 너무 가까워지는 바람에 한참을 도망갔다가 다시 슬금슬금 돌아오는 일도 자주 있었다.
아무리 기회가 많아도 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동물이 있다. 그건 바로 코끼리다. 코끼리는 내가 촬영 다니면서 가장 무서웠던 동물이다. 육식동물도 아닌 초식동물이 무섭다는 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타랑기레 국립공원에 가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타랑기레는 코끼리 천국으로 불리는 국립공원이다. 정말 코끼리가 널려있고 다른 국립공원에 비해 대가족으로 구성된 코끼리 무리가 많다.
이렇게 코끼리가 많다 보니 상아 밀렵꾼들도 그만큼 많이 몰린다. 타랑기레는 도시에서도 가깝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바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보니 나쁜 짓을 하고 도망가기도 쉬운 것이다. 상아는 매매가 금지되어 있지만 아직도 밀렵꾼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국립공원 경계지역에서는 가난한 현지인들이 코끼리를 사냥해서 그 고기를 팔기도 하고, 자신들이 기르는 작물에 피해를 줄까 봐 먼저 코끼리를 공격하기도 한다.
여기 코끼리들은 사람들이 나쁜 짓 하는 걸 알아. 그래서 그걸 총이라고 생각하면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가이드가 우리가 가진 길고 큰 카메라 렌즈를 가리키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확실히 타랑기레 코끼리들 다르다. 다른 국립공원의 코끼리들은 차가 오든 말든 평화로이 풀을 뜯는다. 여기서는 차가 오면 바로 고개를 들고 시선을 고정한다. 타랑기레 코끼리들은 신경이 날카롭고 예민한 편이다.
한 번은 숙소로 서둘러 가는데 갑자기 운전수가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섰다. 혹시 사자라도 발견했나 싶었는데 웬걸? 코앞에 코끼리가 눈을 세모로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식사하는데 방해가 된 건지, 길을 건너려는데 방해한 건지는 모르겠다. 우리 차를 마주 보고 귀를 펄럭펄럭거리니 정말 너무 무서웠다. 좌우를 제대로 안 살피고 직진만 하던 우리가 잘못이긴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이렇게 가는 건가..? 나도 모르게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이대로 밟히는 건가? 여기서 다시 시동을 걸고 달리면 코끼리보다 빨리 도망갈 수는 있을까? 미리 보는 주마등처럼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코끼리 뒤쪽에서 다른 사파리 차량들이 슬금슬금 몰려왔고 우리에게만 집중됐던 시선이 분산되니 사정이 나아졌다. 그런데 관광객들이 차가 멈추자마자 흥분된 열기로 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다시 코끼리가 화내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지만 성격이 나쁜 코끼리는 아니었던 건지 유유히 길을 건너 다시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두껍고 긴 코끼리 코 한방이면 커다란 사파리 차량도 당장에 뒤집어질 수 있다. 그러니 코끼리가 서있으면 이미 많이 봤다고 무작정 지나가려 하지 말고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가야 한다. 코끼리 무리가 이동하던 중이라면 차를 멈추고 가만히 기다리는 게 좋다.
특히나 새끼들이 있는 무리는 더 조심해야 한다. 새끼들은 어미들이 둘러싸고 꼭꼭 숨겨 이동하기 때문에 우리에겐 잘 안 보여 새끼가 있는지 아닌지 모를 때도 많다. 새끼가 같이 있으면 코끼리 무리는 훨씬 더 주위를 경계하고 공격적이라 조심해야 한다. 이런 무리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이럴 때 코끼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같은 초식동물에게도 가차 없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느 흐린 날 오후, 새끼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코끼리 가족 앞에 버펄로들이 진흙 웅덩이에서 한가로이 뒹굴고 있었다. 코끼리들은 피해 갈 생각도 없이 오로지 직진만 했다. 그러다가 잠시 속도를 늦추더니 제일 큰 수컷 코끼리가 선두에 나섰다. 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코를 높이 들면서 오더니 웅덩이에 코를 풍덩 담갔다. 잠시 후 코를 빼서 버펄로들에게 물을 촥촥 뿌려댄다. 누워있던 버펄로들은 기겁을 하며 웅덩이를 빠져나왔다. 아니, 저렇게 크고 땅땅한 버펄로가 이리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수컷 코끼리는 코를 몇 번이고 더 휘두르며 버펄로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불쌍한 버펄로들은 진흙을 뚝뚝 흘리며 수풀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걸 보고 난 절대 코끼리에게 대들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실제로 보고 제일 무서워진 동물이긴 하지만, 코끼리가 느릿한 몸동작으로 풀을 뜯는 걸 보면 여전히 마음이 좋다. 항상 그윽한 눈매에 달린 속눈썹도 길고 예쁘고, 아프리카 지도를 쏙 빼닮은 커다란 귀를 펄럭 거리는 것도 귀엽고, 기다란 코가 꼬불꼬불 살랑살랑거리며 움직이는 걸 보는 것도 재밌다. 그래도 이젠 전만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멀리서 지켜보며 좋아하기로 했다. 때론 거리를 둬야 더 좋은 것도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