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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가 바오밥나무를 싫어한 건 열매를 못먹어봐서다

우리 바오밥 그렇게 무서운 나무 아닙니다.

by 요나

어린 왕자의 작은 별에서 바오밥 나무는 언젠가 별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두려운 존재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매일 아침 바오밥 나무 씨앗을 찾아 없앤다. 맨날 치운다는데 대체 어디서 그렇게 씨앗이 나타나는 건지.. 독하다, 독해. 정말 못된 나무다! 어렸을 때는 작은 별을 망가지게 하는 바오밥이란 나무가 너무 미웠다. 어린 왕자의 소중한 별엔 꾸불꾸불 못생긴 나무보다는 그가 좋아하는 장미만이 가득하길 바랬다.


하지만 이젠 어린 왕자의 그런 행동이 안타깝기만 하다. 다 없애지 말고 한 그루 정도는 키워서 열매를 먹어봤어야 하는데... 한번 먹어봤더라면 어린 왕자는 아마 바오밥 나무를 키울 수 있는 더 큰 별을 개척하러 떠나거나, 사막에서 비행사를 만나는 대신 바로 루아하 공원으로 사파리를 갔을 것이다.



루아하 국립공원에서는 어딜 가나 바오밥 나무를 볼 수 있다. 처음엔 이런 루아하의 풍경이 낯설었다. 세렝게티 초원에는 끽해야 나무 한그루, 아니면 관목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여긴 관목도 많고 바오밥 나무의 존재감도 커서 숲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한국의 숲을 떠올려보면 루아하도 정말 시원하게 탁 트인 공간이지만 세렝게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 든다.


두툼한 바오밥 나무 아래 초식동물들이 유유자적하게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여기가 안전한 곳임을 증명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 말인즉슨 주변에 육식 동물이 없다는 뜻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도 그냥 쉬자! 너무 월루성 발언인가?



촬영지에서 나의 주 업무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거다. 카메라맨이 우리가 점찍은 사자나 치타 앞에서 진득하게 앉아있거나 그들을 졸졸 따라다니는 사이 나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은다. 주변에 다른 사자들은 없었는지, 누우 떼 발자국이 오늘은 어디까지 갔는지, 저 하마는 언제 죽은 건지, 딱 요정도 사이즈의 나무에 걸린 석양을 찍을만한 곳이 어딘지 등등.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건 사자나 치타 같은 육식 동물들을 발견하는 건데 정해진 것 없는 아주 무한한 시간 동안 한없이 푸르거나 한없이 누런 초원을 보면서 다니다 보면 나중엔 막 헛것이 보인다. 틀림없이 사자를 발견한 거 같아 가까이 달려가보면 돌이거나 부러진 나무거나 좀 높은 곳에 자라 있던 풀이거나 그렇다.


솔직히 사자를 찍느라 죽치고 있으면 한낮의 태양이 머리 위에 와있을 동안은 쉴 수 있다. 너무 더워서 사자도 움직이지 않고 그늘에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돌아다니면 내내 집중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고, 그렇다고 소득이 있는 때가 많은 것도 아니니 시간이 지날수록 심란해지기만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바오밥 나무 아래의 임팔라나 기린을 보면서 월루하면 눈도 덜 아프고 곤두섰던 신경도 좀 누그러진다. 주변에 어차피 육식동물도 없으니 혹시 내가 놓칠까 봐 긴장할 필요도 없다. 초식동물들이 보증해 주는 나의 편안하고 안전한 휴식 시간.. 얘네들은 아무 말 없이 있어주기만 하는 거지만 그렇게 평온하게 있는 모습이 내가 걱정하는 것들이 그냥 다 별일 아니라고 해주는 거 같아 위로를 받는다.





루아하에서는 이렇게 잠깐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 또 있었는데 그건 바로 워킹 사파리를 하며 바오밥 나무를 가까이 구경했던 순간이다. 차에서 내리자 가이드가 저 꼭대기에 있는 바오밥 나무 가지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열매가 많이 열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너무 멀어 보이지가 않아 사진을 한 장 찍어서 확대해 보니 세상에, 나무 끝에 달린 새순인지 알았던 게 전부 열매였다.



바오밥 나무 열매는 큰 고구마처럼 생겼다. 사과나 오렌지 같이 알록달록 동글동글한 열매들에 비하면 그다지 매력적인 모양은 아니다. 색도 초록색인지 황토색인지 알쏭달쏭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열매 중 하나를 골라 들어보니 엄청 가벼웠다. 썩은 건가 싶어서 다른 걸 주워보니 또 가벼웠다. 다 썩은 거밖에 없는 거 같다고 하니까 가이드가 그렇지 않다며 귀에 대고 열매를 흔들더니 좋은 거라고 한다. 우리가 수박을 통통 두드려서 감별하듯이 여기도 뭔가의 방법이 있나 보다.



가볍던 무게에 비해 껍질이 잘 깨지지 않았다. 그렇게 단단하니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온전한 모양으로 있을 수 있나 보다. 밟아 보기도 하고 돌로 쳐보기도 하고 힘껏 열매를 깨보니 안에 신기한 게 들어있었다. 나무 잔뿌리에 작은 마쉬맬로우가 잔뜩 달려있는 거 같았다. 정말 난생처음 보는 비주얼이다. 이게 열매..? 먹을 수 있는 걸까?! 저 하얀 것들은 조약돌처럼 딱딱해 보였다.


아마도 섬유질인 거 같은 붉은 실타래 같은 걸 뜯어내고 흰색 부분을 골라냈다. 입안에 넣어보니 생각보다 딱딱하진 않았고 오히려 파우더리 했는데 그렇다고 살살 녹는 건 또 아니었다. 일반적인 과일처럼 과즙이 있거나 달콤할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대체 이건 뭘까..? 마치 뭉친 파우더를 먹는 거 같다. 그런데 먹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신맛이 갑자기 혀를 콕콕 찌른다. 입안에서 열매를 이쪽저쪽 굴리면서 또 그 맛이 나타나길 기다리게 된다. 뭐지, 이 중독성.. 몇 개 더 뜯어내서 먹어봤는데 솔직히 막 엄청 맛있어서 우걱우걱 먹을 맛은 아니다. 근데 이상하게 땡긴다. 자꾸 생각나.. 너 뭐야..


나중에 파우더 형태로 된 바오밥 열매를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렇게 먹는 게 더 편하고 좋았다. 바오밥 파우더는 탄자니아 로컬 슈퍼를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다. 흰색 부분만 골라내서 먹기 좋게 갈아 파는 건데 물에 타서 먹어도 되지만 아주 다 녹는 건 아니라서 마실 때 입안이 좀 꺼끌거린다. 개인적으로는 요거트에 섞어먹는 게 맛있고 편리했다. 스무디로 파는 것도 먹어봤는데 단백질 스무디처럼 건강한 느낌이 있었다.





루아하 국립공원에서는 몸통에 상처가 나있는 바오밥 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초원이 바싹 말라버리는 건기가 오면 코끼리들이 바오밥 나무껍질을 뜯어먹으며 수분을 보충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너덜너덜함을 넘어 나무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바오밥 나무도 있다. 우기에 잎이 무성할 때는 완벽한 그늘도 만들어주니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다. 이런 나무의 씨앗을 어린 왕자는 왜 다 없애고 만 걸까. 진짜 하나만 키워보지. 너무 아쉽다.


아무튼 우리 바오밥 그렇게 악명 높은 나무 아닙니다. 바오밥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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