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렝게티의 석양을 수없이 찍고 나서 알게 된 것
세렝게티에서는 매일 일출과 석양을 찍었다. 일출을 찍으려면 깜깜할 때부터 촬영을 시작해야 해가 뜨면서 밝아지는 걸 제대로 잡을 수 있어 엄청 일찍 일어나야 했다. 보통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5시에 나간다. 정말이지 너무 일어나기 싫다! 세렝게티의 아침은 생각보다 춥다. 옷을 3겹 껴입고도 침낭 속에서 나가기가 두려울 정도다. 그래도 꾹 참고 텐트 밖으로 나가 시리얼과 우유를 간이 식탁에 올려놓고 텐트를 두드리러 다닌다. 운전수들에게도 "하라카, 하라카!" 빨리 서두르라고 재촉한다.
5시에는 나가야 하는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제대로 쉴 수도 없이 매일 야영하며 지내니 모두들 피곤하고 지쳐있다. 시리얼을 급하게 먹고 커피를 마신 뒤 차에 올라 입안에 씁쓸하게 남은 커피의 뒷맛을 느끼고 있노라면 커피를 마셨다기보다는 그냥 입안을 헹구고 나온 기분이다. 장비는 다 실었겠지? 설마 늦은 건 아닐까? 초조한 마음과 함께 어제 골라뒀던 장소로 달려간다. 아직 날도 어두운 데다가 길도 없는 곳을 달리다 보니 바라는 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다. 달리는 와중에 해가 떠버리는 일만은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빌뿐이다.
처음엔 찍은걸 왜 또 찍는지 이해가 안 갔다. 어제 찍었는데 오늘도? 같은 곳인데 뭐가 달라지나.. 하, 배고픈데 오늘도 해 지길 기다렸다가 들어가야 한다니. 처음엔 똥개훈련(!)을 시키는 건 줄 알았지만 세렝게티에서 먹고 자며 해가 뜨고 지는 걸 좀 봤더니 점차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일출이라고 다 같은 일출이 아니었다.
자연은 언제나 새롭게 빛을 담아낸다. 태양이라는 존재는 같을지언정 일출은 매일 다르다. 오늘 아무리 멋진 일출을 건졌다고 끝낼 수는 없다. 내일은 더 멋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무궁무진한 자연 앞에서 고작 인간일 뿐인 내가 여기까지가 최고라고 선 긋는 행위를 할 수가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매일매일 찍어야 한다. 더 멋진 장면은 어느 때 건 나올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석양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맨이 영상을 찍을 동안 차에서 내려 타임랩스를 설치한다. 소리가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그러나 사자가 온다면 언제든 차로 뛰어갈 수 있는 거리를 지키며) 카메라를 조용히 세팅한다. 사진을 몇 장 찍어보고 셔터스피드나 ISO를 조정한다. 왜 이렇게 사진발을 안 받을까? 풍경을 탓해보다가 이내 나의 실력 문제임을 인정하고 이런저런 설정을 바꿔본다. 타임랩스 촬영은 찍기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해서 더 신중해야 하고 그만큼 마음도 더 긴장된다. 이러다가 해가 넘어가버리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은 덤이다.
야외 촬영엔 날씨가 중요하지만 그 날씨가 꼭 맑을 필요는 없다. 사실 맑은 날의 석양은 진짜 별로다. 완전 노잼이다. 해가 그냥 쭉쭉 내려가다가 하늘이 붉게 물들고 동그란 해가 저 혼자서 꾸역꾸역 검푸른 지평선 너머로 넘어간다. 손톱만 한 태양이 사라지고 나면 하늘은 그냥 내리 어두워지기만 한다. 이런 장면은 일출인지 석양인지 서로 구분도 안 간다. 내가 찍었어도 영상을 거꾸로 돌리면 잘 모를 거 같다.
보통 타임랩스는 3~5초 정도 들어가는데 요즘 같이 컷이 짧아진 세상에서 이 몇 초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화면에서 아무것도 안 움직이고 오로지 하늘의 색만 변한다? 아무리 짧아도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5초일 것이다. 눈길을 오래 잡아둘 만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에는 예쁜 장면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내용에 따라서 비 오는 날의 일출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둑한 구름 사이로 슬프게 해가 사라지기도 해야 하고, 구름을 붉게 물들이다가 파란 하늘로 뿅 나오는 희망찬 일출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쩔 때는 아예 해가 안 보이는 석양이 내용과 딱 알맞은 느낌을 줄수도 있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라고 해서 꼭 촬영이 망하는 건 아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따라 뭐가 필요할지 모르니 맑은 날 보다 더 반가울 때도 있다. 그러니 촬영팀은 그저 찍을 뿐이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어제 그랬듯이 찍는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광활한 세렝게티를 보여주려면 화면에 초원과 해만 딸랑 있어서는 안 된다. 단순하게 초원만 찍으면 가늠할 표지가 없어 이곳이 얼마나 넓고 탁 트인 곳인지 티가 하나도 안 난다. 심할 때는 잔디밭하고 뭔 차이인가 싶을 정도다. 하늘이 깨끗할수록 세렝게티의 진면목은 흐려진다.
석양이 아름다우려면 하늘이 지저분해야 한다. 맑은 하늘보다는 너저분하게 이것저것 널려 있고 걸려 있는 하늘이 훨씬 더 좋은 그림을 만든다. 하늘 한구석에 근처의 나무가 같이 보이면 없을 때보다 초원이 훨씬 더 넓게 느껴진다. 나무의 크기는 상관없지만 내 앞에 하나 저 멀리 하나 있으면 딱 좋다. 지평선 가까이에 있는 나무와 비교가 되어서 거리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평선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임팔라가 있어도 좋다. 그 작은 움직임이 초원이 얼마나 크고 생동감 넘치는 곳인지를 알려준다.
하늘에 구름이 있으면 양감이 생겨나 화면에 깊이를 더한다. 단순한 그라데이션이 생길 뿐인 맨 하늘보다 구름의 각면에 빛이 다르게 반사되면 훨씬 재밌다. 지는 태양에 가까운 부분부터 먼 곳까지 구름의 결에 따라 다양한 색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붉은색은 더 붉게 황금빛은 더 반짝이게 만들어준다.
이때 구름은 커다란 뭉게구름이어도 좋고, 크고 작은 모양이 제각각인 구름도, 뜨문뜨문 펼쳐진 실타래 같은 구름도, 이 모든 것이 마구 섞인 구름도 좋다. 구름의 모양에 따라 하늘의 표정이 달라진다. 온화한 얼굴이거나 불길한 표정이기도 하고 따듯하거나 차가운 표정이기도 하다. 바람까지 쌩쌩 불면 금상첨화다. 구름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잔잔하게 움직이면 평화롭고 뭉치고 솟아오르면 벅차기도 하고 압도적인 기분을 느끼게도 해준다.
온종일 햇빛이 쨍하고 맑았던 날에는 저녁에 일찍 들어가도 될 것만 같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오늘 석양은 별 볼 일 없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카메라를 켜둔다. 카메라는 홀로 찰칵거리며 일몰을 찍는다. 그렇게 시간을 맡긴 채로 나는 차 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모자, GPS, 물통, 도시락통, 스펀지, 콩주머니, 카메라 플레이트.. 캠프에 도착해서 정리해도 되지만 그땐 어두워서 플래시를 켜고 치워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배로 걸린다. 미리미리 짐을 싸놓고 캠프에 가서는 1분이라도 빨리 저녁을 먹고 싶다. 가방을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낮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후드티의 먼지를 탈탈 턴다. 밤에는 금방 쌀쌀해지니 아침에 나올 때처럼 똑같이 싸매고 들어가야 한다.
한참 정리를 하고 있는데 불현듯 바람이 불어온다. 초원을 쓰다듬고 오는 서늘하고 길고 긴 바람을 맞으며 카메라가 찍고 있는 방향을 본다. 바람이 밀어온 구름이 어느새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구름은 여기서부터 저 멀리 해가 넘어가는 곳을 얼기설기 채우고, 손에 잡힐듯한 곳부터 별이 내려오는 곳 까지를 또 채운다. 구름이 넘어가려는 햇빛을 먹고 옅은 노란색으로 다시 복숭아색으로 그리고 짙은 주황색으로 변한다. 황홀하게 붉은 구름의 반대편은 설설한 남색으로 물든다. 정말 끝내주는 석양이다. 기다려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루샤와 세렝게티를 무수히 왕복하던 시절의 나는 이제 내가 아닌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시절에 배웠던 몇 가지는 아직 마음속 깊게 남아있다. 한껏 맑기만 한 하늘은 재미가 없다는 것, 바람이 불어와도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 찌푸린 구름일지라도 석양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인생도 그렇다는 것. 좋은 일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기다려서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 세렝게티는 그런 것들을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