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se Barrera의 'Casual'을 들으며
"'폴리아모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몇 년 전, 그와 세 번째 만나는 날 내가 했던 질문이다. 주말 오전에 만나 오랜만에 개봉한 홍상수 영화를 같이 본 날이다. 길티플레져이지만 나는 한국 영화감독 중 홍상수를 가장 좋아했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는 홍상수를 싫어했지만 다행히(?) 전공이 영화연출이어서 자신이 싫어하는 감독의 영화도 볼 줄 알았다. 내가 홍상수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니깐 자신의 취향은 아니지만 같이 봐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그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지만,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처럼 여러 남자를 동시에 만나는 것은 싫어한다. 혹은 여러 명에게 동시에 껄떡거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를 같이 본 그 남자에게 '폴리아모리'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지금은 폴리아모리라는 단어가 좀 유행이 간 듯 하지만 당시에는 시사주간지의 표지이야기에도 실릴 정도로 인기가 있는 단어였다. 그리고 폴리아모리를 해야지만(?) 쿨한 사람인 것처럼 종용해 가는 분위기도 있었다.
(*폴리아모리: 한 번에 사랑하는 사람의 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그는 나에게 다시 질문을 돌렸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왜냐면 나의 답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러 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폴리아모리 저는 싫어해요. 저는 사랑을 책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랑하다가 권태기가 와도 책임으로 그걸 이겨내야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여서요. 그걸 못이겨내면 사랑하는 게 아닌거죠. 일종의 의리같은 거요.
그냥 사귀지 않고 여러 명을 만나는 건 상관없는데 사귀기로 한 이상 한 명만 만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지금 만나는 사람과 헤어지고 만나는 게 맞죠. 폴리아모리는 폴리아모리끼리만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에게 질문을 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단호한 답을 했다. 그 역시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단순하게 말했다. 아마 내가 폴리아모리에 대해 좋게 말했어도 그의 답은 "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였을 것 같다.
내 질문의 의도는 너무나 명확했다.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 영화에 나온 것처럼 '쿨한' 연애를 할 생각은 없으니, 잘 알아두라는 경고(?)였다.
갑자기 홍상수와 폴리아모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순전히 'CASUAL'이라는 노래 때문이다. 사실 음악에 대한 글은 매우 인기가 없음을 알고 있기에 자주 쓰지 않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오만 잡다한 생각이 들기에 'CASUAL'하게 쓰기로 했다.
이 노래가 나온 것은 2020년으로 이미 3년이나 지난 노래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꼽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다. 이 노래의 제목, 가사, 음정도 좋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세명의 뮤지션이 함께했다는 것도 꽤 기적 같다고 생각한다. Jeff Bernet의 경우 2012년 'Call you mine'으로 유명세를 타서 국내에서도 유명한 뮤지션에 속한다. Johnny Stimson 역시 'Flower', 'Honeymoon', 'T-shirt' 등 엄청나게 많은 히트곡을 보유한 뮤지션이다. 나는 평소에 Johnny Stimson의 노래를 정말 많이 들었고 Jeff Bernet은 대학생 때부터 많이 들어왔다. 이들의 조합만으로도 기대가 컸는데 음악이 황홀할 정도로 좋아서 3년 동안 계속 감상하고 있는 노래가 바로 'CASUAL'이다. 원곡보다 어쿠스틱 버전이 더 좋게 느껴져서 이 영상을 무한반복으로 재생한 지도 오래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HlnurlJiqyA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무한반복하긴 하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잡다한 생각이 스친다. 이 노래의 제목처럼 내용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캐주얼하게 계속 만나자'는 식의 가사다. 먼 길을 함께 떠날 것이고, 밤을 꼬박 같이 새울 것이고, 아침까지 대화를 할 것이고, 일주일 내내 소파에 파묻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관계는 천천히 생각하자, 흘러가는 대로 편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내용이 이 노래의 가사다.
'CASUAL'한 관계라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게 편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쉽게 말해 '썸'을 유지하는 느낌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썸보다는 연애에 가깝지만, 조금은 가벼운 연애의 느낌. 그래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폴리아모리'의 연애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미 상대를 좋아하지만, 상대는 그만큼 확신이 없기에 '우선 캐주얼하게 만나보자'라고 설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달콤한 음정처럼 아마 그런 의도가 맞긴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꾸 지나간 삶에 비춰 '캐주얼하게 만나자'는 말이 곱게 들리지 않는다. 보통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상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이 상대를 가볍게 만나고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캐주얼'하게 만나다가 상대가 조금 더 깊은 관계를 원하면 '우리 가볍게 만나는 거였잖아' 혹은 '나는 가벼운 관계만을 원해' 같은 식으로 깊이를 거부하는 사례를 많이 봤다. 나도 한번 된통 당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는 썸을 타는 사람들에게 '폴리아모리' 질문을 던져서 그런 사람을 피해나갔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이 노래의 달콤한 음정에 취하다가도 '아니 정신을 차려야지. 이런 꼬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라고 조잡한 생각들이 스친다.
그럼에도 나는 이 노래를 정말 좋아한다. 홍상수 영화를 가장 좋아하면서 폴리아모리나 쿨한 연애는 부정하는 나. 'CASUAL'이라는 노래를 가장 좋아하면서도 '캐주얼한 관계'는 싫어하는 나. 나 역시 이런 관계를 원하지만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이토록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 강한 부정은 긍정과 같고,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이중감정을 갖는 것이 보편적이니깐. 그래도 나는 홍상수의 영화로, 'CASUAL'이라는 노래로 나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채우는 길을 선택하겠다. 나는 폴리아모리 싫어한다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