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경 Sep 29. 2023

E와 결혼해 버린 I의 여행

"너는 잘 맞춰주네?"라는 말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

아마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제주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일을 하려면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하는 나의 소심함, 길치라는 특성, 안전 강박이 더해져 나에게 여행은 즐거움보다 두려움의 영역이다. 특히 아기와 함께해야 하는 여행이라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혼자서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대학생 때 대외활동으로 프랑스에 갈 일이 있었다. 파리에 2일 정도 먼저 도착해 혼자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의 '혼자 프랑스 여행'은 내 생애 가장 끔찍했던 여행으로 기억된다. 호텔 방 한가운데 놓였던 수술실 침대 같은 곳에서 자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무서워 오후 5시면 그 호텔로 돌아왔는데도, 호텔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무서워했던 것이 여행 기억의 전부다.


회사에 입사한 후 혼자 '비즈니스 트립'을 갔을 때도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공항 가는 리무진에서 '나, 살아서 한국에 돌아온다면 착하게 살겠습니다' 따위의 다짐을 할 정도였다.




난 이렇게 여행을 싫어하는데 남편은 툭하면 여행을 가려고 한다. 아기를 낳고 얼마 안 되었을 때도 남편은 너무나 여행을 가고 싶어 했고 아기를 데리고 나까지 같이 가느니 그냥 혼자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 3박 4일 혼자 여행을 다녀오라고 할 정도였다. 여행을 못 가게 해 봤자 풀리지 않는 여행 욕구 때문에 계속 여행 이야기를 할 것이 뻔하고, 그러다가 나와 아기까지 모두 같이 가자며 표를 끊을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와 아기까지 나가서 고생을 하느니 그냥 집에서 혼자 아기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내 나름 배려(?)를 한 것이다.


이렇게 두 달 전 여행 욕구를 풀게 배려했음에도 남편은 추석 연휴에 맞춰 세명 분의 제주도 티켓을 끊었다. 아기는 6개월이 되어갔고,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 'X개월 아기와 제주도 가기' 등의 여행기가 파다했다. 아기가 너무 어리니 다음에 가자고 하기에 이 시기의 아기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제주도 여행 준비를 하고 있는데 최근 친분이 생긴 한 이웃이 말했다.


"남편이 여행을 좋아하시는군요.  복도에 캠핑 장비도 많고, 자전거도 몇 대 있고. 수영에. 엄청 활동적인 가봐요."


"네. 활동적인 편이에요. 여행도 좋아하고요. 캠핑도 자주 가요. 저는 집 놔두고 왜 밖에서 자려고 하는지 아직 모르겠지만..."


"어머,  여행을 안 좋아하는군요. 둘이 비슷한 성격인 줄 알았어요. 그래도 그렇게 같이 다닌다니 잘 맞춰주는 성격인가 보네요."


'맞춰준다'라는 말에 '맞아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분명 여행을 싫어했지만 내가 남편과 여행을 갈 때의 감정은 '맞춰준다'는 느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6개월이 되는 아기와의 첫 여행. 공항 도착 전 지하철역에서 수유를 했다.




잘 맞춰주는 성격이라고 하기엔 나는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매번 꾸역꾸역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여행을 같이 떠나려 할까. 부부라는 것이 함께 있는 게 디폴트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남편이 나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가기 싫다더니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마 인스타그램에 계속 여행지의 모습을 업로드하고, 업로드를 위해 열심을 다하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 수도 있다.


일단 난 무언갈 하면 기록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게다가 여행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찝찝함을 남기게 한다. 이처럼 여행을 가면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이 많긴 하다.


남편과 갑작스러운 여행이나 캠핑을 통해 그 하기 싫은 준비들을 꾸역꾸역 하고, 약간의 두려움이 안정감으로 뒤바뀌는 여행 후를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여행을 통해 성장해 왔던 것 같기는 하다.


내 불안 중 많은 부분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안도감, 안전지대를 벗어나도 나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너는 매번 새로운 곳을 잘 찾아가네'라고 말해주는 타인들의 칭찬도 기분이 좋다. 여행지에서 생활 터전을 꾸린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내가 이곳에서 산다면 어떨까' 같은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을 꿈꿔보기도 한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곽지 해수욕장에 간 때다. 우리는 아기를 데리고 떠났기에 애월 쪽에 잡은 숙소 주변에서만 2박 3일을 보낼 셈이었다. 이틀째 되던 날, 차로 멀리 않은 곽지 해수욕장을 찾았다. 모래해변 정도는 아기를 안고 거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곽지 해수욕장에 가니 바다에서 서핑을 타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바다에서 서핑을 타거나, 해변가에서 파라솔을 펼치고 누워있는 사람들만 보였을 테다.


이번에 내 눈에 가장 띈 것은 곽지 해수욕장의 '천연 키즈풀'이라고 부를만한 공간이었다. 까만 현무암들이 경계를 만들어 어른 발바닥 정도만 겨우 잠길, 아주 어린아이들도 놀기 좋은 물가가 2~3군데 있었다. 이미 그곳에는 1~3살 정도의 아기들과 부모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곽지 해수욕장에서의 '천연 키즈풀'. 아주 얕은 물가가 있어 아기와 놀기 좋다.


남편은 "서울의 키즈풀이나 리조트의 아기풀에서 놀리려고 했는데. 여기 '진짜'가 있었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네. 이게 진짜네"라고 대꾸했다.


남편은 이어 "이런 풍경에서 아기를 놀리고 있으면, 서울의 삶은 가짜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라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나 역시 '진짜 삶을 놔두고 서울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나는 서울의 삶도 진짜이고, 제주에서의 여행 역시 진짜라는 것을 떠올렸다. 꼭 '진짜'가 하나일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제 나는 안다.




20대 때 여행을 지독하게 싫어했던 나는 여행이라는 것이 '가짜' 혹은 '도피'라고 생각했다. 퇴사를 하고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보면 '진짜'로 할 일이 이렇게 쌓였는데 여행을 가면 안 찝찝한가? 왜 계속할 일을 미뤄두지?라고 생각했다. 현실을 미뤄두고 여행을 가서 즐기는 것이 '가짜'처럼 느껴진 것이다.


반면 30대 때 종종 여행을 떠나면, 서울에서나 회사에서의 일상이 '가짜'라고 느꼈다.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꾸리는 것이 '진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 제주에서는 일상이나 여행이나 모든 것이 진짜 삶이라는 것을 느끼고 왔다. 밤이 있어야 낮이 있고 낮이 있어야 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짧은 여행이지만 여행은 항상 나도 모르는 나의 생각을 들춰낸다. 내가 원하는 것을 직시하게 한다.


 나는 도시에서 치열한 일상을 살고 싶기도 하며, 가끔은 한적한 공간에서 자연을 느끼고 싶기도 하다. 둘 중 하나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한정현의 '환승인간'이라는 에세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가보지 않은 세계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건너갔더니 거기엔 오히려 진짜 내가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의 취향을 알고 같이하는 걸 '맞춰준다'의 범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

결국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최초이자 최후의 환승지는 자기 자신이다. 정말 좋은 사랑이라는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온전한 '나'가 남는 것이다. 오롯이 나로 환승하는 것이다.


지인이 나에게 '너는 여행을 싫어하는데 남편에게 잘 맞춰주네'라고 말했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여행을 싫어하는 내향형인 내가 외향형인 남편에게 ‘맞춰주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그런 면도 있지만, 나 역시 꾸역꾸역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곳에 가서 찾는 ‘나’가 반갑기 때문일 것이다.


6개월 아기, 곽지 해수욕장에서 처음으로 바닷물에 발 담가봤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먹으러 다닌 것만 기억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