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대화 세계 2
많은 사람들이 ‘이상형’의 조건으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꼽는다. 연애 2년에 결혼 5년, 아직까지(?) 남편과의 대화 시간이 제일 재미있다. 육퇴 후 소소한 안주와 술 한잔을 곁들이며 대화하는, 진부한 행복을 기록해보려 한다.
"우리 일본 여행 갔었을 때, 긴자에 있는 백화점에서 소바 먹었던 곳 기억나?"
"응응, 여기랑 비슷하다는 이야기 하려고 그러지?"
"응, 백화점이라 전망도 비슷하고 자리 배치나 그런 것도 다 비슷해서 그 긴자 백화점이 떠올랐네."
신촌에 위치한 백화점으로 아침 일찍 중식을 먹으러 간 날이었다.
우리 부부의 취미 생활은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이 맛집 투어였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고 난 후 예전처럼 맛집을 찾아다니기는 불가능해졌다. 실내라 바닥이 매끈해 유모차를 끌기 편안하며, 온도와 습도가 아기에게도 적절하며, 수유실이 갖춰져 있으며, 아기를 데리고 다녀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 곳. 백화점과 대형몰 외에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은 찾기 어려웠다. 여느 아기가 있는 부부처럼 우리도 백화점 안에 위치한 식당에만 주구장창 갈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백화점 내 맛집 보다 구불구불한 골목 속에 위치한 맛집이나 '이런 데에 식당이 있다고?' 싶은, 으스스하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꼭대기 층에 숨어있는 맛집들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오히려 아기가 태어나기 전 추억에서는 백화점에서 먹은 식사가 기억이 날 정도였다.
긴자 백화점 속 식당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본 여행 추억 꺼내기가 시작됐다.
"긴자에 있던 식당, 진짜 비쌌는데 솔직히 그만큼 맛있는지는 모르겠더라."
"진짜 맛있었던 건 오히려 아키하바라에서 지하에 있던 규카츠 집이었어."
"아, 그거 맛있었지. 첫날에 도쿄에서 '호르몬' 어쩌고 쓰여있던 식당도 기억나지?"
"어. 그냥 곱창집인 줄 알았다가 (호르몬은 일본 말로 곱창이라는 뜻) 그... '혀' 부위가 나와서 진짜 식겁했었잖아."
"시부야에서 2시간 웨이팅 해서 먹은 초밥집이 진짜 맛있었는데."
"그 그 길 잃어서 이상한 골목에서 발견한 엄청 이쁜 붕어빵집도 좋았어."
"오모테산도에서 타코야끼 먹었던 것도 재미있었잖아. 길거리에서."
"어째 다 먹는 이야기뿐인 거야."
"사는 게 뭐 있겠수. 그냥 사랑하는 사람 만나고, 그 사람이랑 맛있는 거 먹고. 그 추억 이야기하면서 또 맛있는 거 먹고. 그러고 사는 거지."
그날 이야기는 조금은 허무한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며칠 뒤 남편이 빌려놓은 책 '프리 워커스'를 내가 집어 읽고 있었다. 그 책에서는 왜 우리가 '먹은 것만 기억이 나는지'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프리 워커스'는 크리에이티브 그룹인 모빌스가 자신들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인터뷰한 것을 모아둔 책이다.
-스몰 브랜드일수록 팬들과의 연결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각 브랜딩에 대한 책을 하나 읽었어요. 사람들은 만진 것의 1%, 들은 것의 2%, 본 것의 5%, 맛본 것의 15%, 맡은 것의 35%를 기억한대요. 여태까지의 브랜딩이 주로 시각만을 활용했다면 거기에 감각을 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책 '프리 워커스' 282p, 서은아 페이스북 코리아 글로벌 비즈니스 마케팅 상무의 인터뷰에서 인용
아, 그래서 우리가 수많은 여행의 기억 중 먹은 것만 기억이 났구나. 사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본 것+ 맛본 것+맡은 것' 세 가지 모두가 충족되는 행위이구나. 그래서 기억이 잘나는구나.
우리가 먹보여서가 아니었어.
냉큼 남편에게 며칠 전 우리의 대화와 함께 오늘 발견한 책 구절을 낭독해 줬다.
"오호."
지나간 허무한 대화를, 이 책에서 발견한 근거로 인해 조금 더 풍성한 대화로 마무리 지은 느낌이다. 뿌듯하다. 오늘의 안주는 내가 만든 크림치즈를 바른 후 훈제연어를 올린 바게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