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려준 산책

산책일기 준비 편

by 소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산책을 검색하면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라고 나온다. 어렴풋이 나에게 남아있는 산책의 이미지는 공원이나 길을 목적 없이 걷는 행위였는데 산책은 목적이 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이 산책이었다니. 나는 산책을 매우 올바르게 행하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좋아하는 일을 해도 나를 돌볼 새 없이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느 때에 회사와 집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도 하고 따로 시간을 내어 운동할 에너지가 없어 퇴근길을 걷기 시작했다. 산책을 사전에 검색하기 전까지도 목적 없이 걷는 행위가 산책인 줄 알았기에 그때의 퇴근길도 운동스러운 걷기와 산책의 중간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쌓여있었을까, 가을에서 겨울로 달려가는 시점에 코를 훌쩍거리며 내가 미처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마음들을 대신 외쳐주는 노래를 들으며 매일 한 시간 거리의 퇴근길을 걸었다. 마음에 쌓인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어디로 흘려보내야 하는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힙합 노래를 들으며 길거리에 하나둘씩 버려두어서일까, 어느새 귓가에는 분노와 화를 대신 내주는 노래들은 사라졌고 조금은 서정적인 노래들이 퇴근길을 함께해 주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고 싶고, 운동 대체라고 생각했던 산책(걷기)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비울 수 있었고, 마음에 품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멍하게 앞만 보면서 씩씩하게 걷고 또 걸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걷는 시간에는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걱정도, 속상함도, 짜증도, 미움의 감정들이 잠시 나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고 자연스레 걷는 행위를 좋아하게 되었다.


예전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길을 따라 걸으며 보았던 풍경만 생각난다. 때론 나무 계단이기도, 등산길처럼 산을 오르기도, 오솔길 같기도, 낭떠러지를 옆에 두고 아슬아슬하게 걷기도, 정말 황량하고 쓸쓸한 들판을 걷기도 했던 모든 풍경이 생각난다. 어쩌면 그때부터 걷는 행위는 나에게 잘 맞는 친구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많은 이들이 애써 둘레길을 걷고, 스페인에 순례자길을 걷기 위해 향하고, 트레킹을 하는 이유가 온전히 눈앞에 풍경으로 멍하니 생각을 비울 수 있어서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 밖으로 내어놓고 청소를 위해 가졌던 나의 산책은 지금까지도 나를 숨 쉬게 한다. 번아웃이 오고 몸이 아프고 결국 퇴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집 근처 공원에서 천천히 걷는 것 외에는 없었다. 퇴사 직후 30분의 산책도 간신히 하던 나는 매일의 산책을 통해 금방 1시간은 거뜬히 걸을 수 있었고, 유일하게 무언가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산책이었다. 퇴사 후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산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매일의 산책은 이 시간에는 햇빛이 이렇게 내리쬐는구나, 그래서 나무의 이쪽 부분은 단풍이 들었지만 이쪽은 아직 초록색이구나, 바람이 살랑 부니까 이쪽 풍경은 아름답구나,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소리는 이쪽 나무랑 저쪽 나무랑 다르구나, 여기에 벤치가 있었구나, 오늘은 하늘의 색이 이렇구나 라며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해 주었다. 지금 여기에서 걷고 있기 때문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들로 기분이 나아지고 조금은 더 힘을 내어 걸어볼까 싶은 생각들이 들었다.


가을을 한껏 느끼며 산책을 즐겼던 시간을 바탕으로 운동을 시작했고, 퇴사 후 회색빛이던 나의 모습은 조금씩 건강한 몸과 마음을 채우며 여러 색으로 채워져 갔다. 산책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글도 쓰지 못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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