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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 May 11. 2024

산책의 날들

문장큐레이션 오곰장 편지 에세이 14호

"나는 회사 근무시간에도 인간에 대한 환멸이 느껴지는 순간이면 종종 편의점으로 달려가 1,000원짜리 스트링 치즈를 산다. 그걸 양손으로 비비며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서 결결이 찢어먹으며 회사 뒷골목을 걷다가 돌아온다. 큰 위로는 아니지만 즉각적인 위로다. 꼭 필요한 순간, 꼭 필요한 강도의 위로다."

� 김민철, <치즈 :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세미콜론)


나 자신을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말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즉각적인 위로. 나에게는 산책이다. 김민철 작가의 문장처럼 회사에서 협력사의 무례함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그 감정을 동료들에게 옮기기 싫어서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회사 앞에 경의선 숲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씩씩거리며 나무들이 양옆으로 잔뜩 늘어선 길을 걸으니 감정이 조금씩 버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 깨끗이 회복하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기운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빠지지 않는 답변이 “산책”이다. 산책은 번아웃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리던 내가 어둡고 질척이는 감정을 털어버릴 수 있게 도와주었고, 계절의 변화를 눈과 코와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고, 바쁘게 걷느라 놓쳤던 것들을 보여주었다. 하늘의 구름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 햇빛을 받고 바람에 살랑거리는 이름 모를 들꽃과 들풀들, 높이 솟은 풍성한 나무들, 바깥 놀이를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과 선생님들, 나처럼 혼자 산책하는 사람, 강아지와 걷는 사람, 아이와 함께 천천히 걷는 사람, 유모차를 밀고 있는 조금은 지쳐 보이는 누군가, 큰 가방을 메고 빠르게 걸어가는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 등등 보이지 않았던, 만날 수 없었던 장면들이 매일의 산책에 나타났다. 산책으로 만난 풍경들을 느리고 따스하게 즐기다 보면 복작거리는 생각과 감정들이 잠잠해지면서 고요함을 느끼게 된다. 김신지 작가의 말처럼 "멍의 시간을 갖는 것뿐인데 잘 산다는 기분이 든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절기인 처서가 오고 나니 아침과 저녁의 공기가 산책하기 좋아졌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시기다. 오늘도 산책길의 나의 나무에게 인사하고 와야지. 밤새 잘 있었냐고, 뜨거운 여름을 잘 버텨주어 고맙다고.




문장큐레이션 오곰장 편지 뉴스레터에 실린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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