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굴 비행기
‘띵!’
안전벨트 사인 꺼지는 소리가 출발 신호다. 벨트를 풀고 일어나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조리실과 복도를넘나들며 준비하는데 조리실에서 준비가 더 바쁘다.첫번째 서비스가 끝날 때까지 경주마가 따로 없다. 앞만 보고 달린다. 비행을 시작하고 변한 것 중 하나는 속도다.
입사 전, 밥을 먹으면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차려준엄마 속이 터질 정도로 꼭꼭 씹다 보면 훌쩍 시간이 갔다. 입사 후, 기내에선 콩 볶아먹듯 후루룩 먹었다.신입이라 눈치껏 빨리 먹고 후다닥 나온다.
밥 먹는 속도에 비례해 일하는 속도도 빨라져 갔다. 한국인을 ‘빨리빨리’의 민족이라 한다. 한국인 승무원이 되니 ‘빨리’를 하나쯤 더해 ‘빨리빨리빨리’ 정도의 빠르기가 됐다.
비행은 어찌 보면 시간 싸움이다. 문 닫기 전까진 정시 출발이 중요하다. 하늘에 오른 후론 시간 안에 서비스를 준비해 알맞은 때 나가고 제 때 내리는 걸 신경 쓴다. 이제나 저제나 기내식을 기다리는 승객들에 마음도 바쁘다. 신입 때는 빨리 해야 욕먹지 않는 분위기란 압박도 더해진다. 막내 때 성미 급한 선배와 함께 하다 카트로 슬슬 밀려난 적도 있다. 몸에 닿는 차가운 카트보다 차디 찬 선배 눈빛이 더 오싹했다. 그 때 알았다. 교육원 실습에서 배우듯 우아하게 움직이다간 이 날의 짐덩이 예약이구나.
입사 후 1년이 채 안 돼 상위 클래스(비지니스석과 일등석) 교육을 받았다. 비즈니스석 첫 비행은 보잉 747기종 2층에서였다. 비행의 서비스 업무는 갤리와 아일로 나눈다. 갤리는 주로 선배가 기내 조리실에서 나갈 서비스를 준비한다. 아일은 그걸 가지고 승객들을 대한다. 준비하고 나가는 시간을 서로 잘 맞추면 전체 응대도 부드럽게 이어진다. 승객이 어떤가보다 같이 일하는 사람의 영향이 크다. 특히 경험이 많지 않은 후배에게 갤리 선배는 그 비행을 좌우한다. 그 날 갤리는 느린 걸 유난히 싫어하는 9년 위 팀 선배였다. 후배 군기잡는 걸로도 유명했다.
‘최대한 빨리 하자’ 마음먹고 갔다.
다짐과 달리 지상에서부터 일이 꼬였다.
운항 승무원이 선배에게 조종실 물품을 찾았다.
747은 조종실이 2층에 있어 필요 물품을 2층 승무원이 준다. 내가 1층에 뭘 가지러 간 사이 물어본 모양이었다. 선배가 바쁠 때 물은 게 심기를 거슬렀다. 2층 마지막 계단에 발이 닿기도 전, 아직도 조종실에 안 다녀왔냐며 불똥이 튀어왔다. 안 그래도 긴장한 첫 비행에 땅에서부터 깨지고 시작이라니.
옛날 747 비행기는 수납 공간이 조리실 앞 낮은 곳에 커튼으로 가려있다. 당황스러움에 눈물 나기 직전 신문 카트를 꺼내는 척 얼른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일단 꾹 삼키고 웃으며 나왔다. 매서운 인상의 선배 얼굴이 호랑이 얼굴과 겹쳐 보였다. 까딱하면 물려가겠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승객 탑승 준비를 끝내 갔다.
여느 때처럼 환한 비행기 안이 내 눈엔 아까 들어갔다 나온 코트룸같다. 호랑이굴같이 캄캄해보인다. 아무일 없는 듯 움직이지만 마음엔 ‘서.두.르.자’
네 글자를 채웠다. 선배 속도에 맞추느라 바빴다.
이륙 후 벨트 사인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갤리 업무에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두고 승객에게 갔다.
비즈니스석 서비스 순서대로 메뉴책을 주고 주요리 주문을 받는다. 테이블보를 하나씩 올렸다.
‘빨리 하자. 빨리빨리’. 앞 네 줄을 지났다. 비상구를 지나 다음 열에 놓는데 뭔가 이상했다. 실습 때 본 린넨보다 눈에 띄게 작다.급히 가져오느라 테이블보대신 코튼 냅킨 (용도가 달라 크기가 작다.) 을 들고 온 거다. 식탁이 다 가려지지 않아 테두리가 훤히 보였다. 서두르느라 엉뚱한 걸 네 줄 넘게 놓으면서도 몰랐다. 생뚱맞은 코튼 냅킨을 손에 쥔 채
‘뭐 때문에 이리 서두르고 있지, 지금 선배한테 서비스하나 승객한테 서비스하나’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호랑이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댔는데, 난 지금 차리긴 커녕 아예 놓았구나.
시원한 기내에서 혼자만 등에 땀이 난다. 슬쩍 조리실 쪽을 봤다. 팀장님과 선배 뒷모습이 보였다. 검정 줄무늬 통통한 황색 꼬리를 본 것도 같다.
이 쪽을 보기 전에 다 없던 일로 만들어야 했다. 바꿀승객은 앞쪽 열 한명. 종종 걸어가 린넨 꾸러미 속 테이블보부터 찾았다. 트레이 매트 아니고, 카트 매트도 아니고.. 테이블보만 빼고 온갖 린넨들이 차례로 손에 잡혔다. 맘이 타들어가던 중, 속으로 비명이라도 지를만큼 반가운 테이블보가 보였다.
택에 영어로 작게 써 있는 ‘테이블 클로스’ 란 이름도한번 더 확인했다. 애써 태연한 얼굴로 앞줄부터 하나둘 바꿔간다. 다행히 선배가 뒤돌기 전 끝냈다. 나와 의리있는 승객들만 아는 에피소드로 끝났다.
진땀나는 상위클래스 첫 비행 후, 일할 때 최대한 침착하겠다 다짐했다.
날쌔게 일하는 게 몸에 배어 마음처럼 안될 때가 많았다. 처음엔 분위기에 맞추느라 나중엔 습관이 되어서다. 그래도 서두름이 나에게도 받는 이에게도 좋은 기분을 주는 응대라 느껴지지 않아 노력했다. 돌아보면 코튼 냅킨말고도 서두를 때 실수가 잦았다. 당연한 말같지만 분위기에 휩쓸리면 급해진다.
무슨 일이든 급하면 과정도 흐려진다.
내가 뭘 왜 하는지, 무얼 중요하게 생각하며 할 건지 모르게 된다. 여유와 알맞은 속도를 더 신경쓰게 됐다. 급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단순히 느리게 행동하는 것과 좀 달랐다.
천천히 하면 생각할 틈이 생긴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내 기준이 뭔지 기억할 수 있다. 다른 사람말고 내가 생각하는 일을 잘 하는 게 뭔지 알고, 좋은 서비스에 대해 스스로 정의도 내려볼 수 있다.
물론 필요할 땐 차분한 신속함도 중요하다.
와중에도 늘 내 중심이 단단히 있어야 한단 걸 알았다. 비행도, 회사 생활도, 사는 일도 꼭 필요한 건 그거였다. 내 생각이 아닌 무언가에 등 떠밀려 속도를 내기 전에 말이다.
다양한 상황의 바쁨때문에 신속하게, 일 못한단 소리듣는 건 곤란하니 빠르게.
바깥에 중심을 두고 움직일 때 내 박자를 갖기란 어렵다. 퇴사 전까지도 남아있는 습관에 가끔 튀어나오는 급한 맘을 누르려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을 내 속도나 기준으로 압박하는 선배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내게 비행은 바깥의 속도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내 빠르기로 해 나가는 연습이었단 생각이 든다.
속도보다 알맞은 리듬을 찾아가는 일. 남과 어우러지면서도 내 장단을 믿고 춤추는 단련이 됐다.
여전히 서두르게 되는 때가 있다. 요즘도 종종 남의 눈에 괜찮아 보이는 방향으로 잽싸게 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호랑이굴에서 기내식 주던 기분을 떠올린다.
급하지 말자. 다른 건 개의치 말자. 나한테 중요한 게뭔지 기억하면서 걷자.
걷는 듯 느려도 맞는 방향에 스스로 만든 박자로 움직이는 거라면 괜찮으니까.
“아빠가 부탁이 있는데 잘 들어주어.
밥은 천천히 먹고 길은 천천히 걷고 말은 천천히 하고 네 책상 위에 '천천히' 라고 써 붙여라.
눈 잠깐만 감아 봐요, 아빠가 안아줄게, 자 눈 떠!”
얼마 전 한 편지글을 봤다. 딸을 아끼기로 유명했던 피천득 선생님이 딸과 떨어져 있을 때 쓴 글이다.
내 몸같이 사랑하는 딸에게 하는 부탁도 ‘천천히’ 인 게 눈에 띄었다. ‘천천히’ 란 흔한 말이 따뜻하게 눈에 담겼다. 소중한 이가 모든 것에 서둘지 않길 바라는 맘이 느껴져서 인가보다.
밥은 마시듯 먹고 길은 나는 듯 걷고 말도 점점 빨라져 봤던 나에게,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동동거리는 때를 지나는 누군가에게도 같이 천천히 해 나가자, 조급하지 말자, 나도 편지를 띄우고 싶어진다.
오늘 아침엔 서랍 속 포스트잇을 하나 꺼냈다.
분홍색 정사각형에 연필로 써 붙였다. ‘천천히’
매일 다잡고 곱씹어야 마음은 기억하니 자주 바라볼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