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의 달
초가을, 워싱턴 비행에 와 있다.
“ 무알코올 블루베리 바닐라요. ”
옆 테이블에서 음료 이름을 묻길래 답했다. 배가 고파 눈에 띄는 걸 고른 건데 잘 아는 척한 것 같아 좀 멋쩍다. 은색 단발이 멋진 손님은 같은 음료를 주문하더니 로디아 노트에 연필로 뭔갈 적는다. 옆에서 메모지에 낙서를 하던 터라 괜히 반가웠다.
은발의 그녀와 나란히 앉은 곳은 워싱턴의 독립 서점, 크래머즈다.
정확히는 크래머북스 앤 애프터워즈(Kramerbooks&Afterwords cafe)란 서점 안 카페.
깨자마자 우버로 달려와 눈비비며 음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맺음말’이란 카페 이름이 맘에 들었다. 그러다 내 비행의 맺음말도 곧이구나, 하고 떠올린다.
이렇게 퇴사 생각이 불쑥 떠오른다. 떠올라서 생각나는 게 아닌가. 요즘 기본처럼 깔려있는 배경 생각같기도 하다. 얼마 전부턴 일부러 더 별 생각을 안 하려한다. 전원이 켜진 로봇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는데만 힘쓴다.
여전히 스케줄대로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닌다. 퇴사 날짜가 지나도 며칠 쉬면 또 짐을 싸 떠날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실감도 안나니 일단 정해놓은 날까지 할 일 마무리 잘 하는 것만 신경쓰자 싶었다.
오기 전 근처 빵 맛집에서 산 에클레어를 먹을까 말까 상자를 만지작댈 때쯤 음식이 나왔다. 홈메이드 크랩케이크, 페투치네면, 체리 토마토, 칠리 플레이크, 허브, 레몬 브라운 버터 소스의 크랩 케이크 파스타. 입사 초 시애틀에서 처음 먹고 좋아하게 된 크랩 케이크를 반갑게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려다 크랩 케이크를 닮은 엄마 동그랑땡 생각이 난다.
맞다, 오늘 추석.
인천에서 13시간을 날아와 잠든 동안 깜빡 잊었지만오늘은 추석이다. 주말이나 연휴가 의미없고, 희미한 날짜 감각이 당연해진지 오래다. 그런데도 순간, 명절날 한국에서 11,162km 떨어진 도시 식당에 앉아 있단 게 새삼스러웠다.
‘이런 것도 이제 마지막이야.’
막 나온 스파게티를 휘적휘적 포크로 섞다 속으로 말했다. 자주 와 낯설지 않지만 결국은 낯선 땅에서, 추석 동그랑땡 닮은 크랩 케이크를 뒤적이는 일 같은.
배고픈만큼 양껏 떠 입에 넣었다. 통통한 크랩 케이크의 겉은 살짝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게살의 달콤하고 짭짜름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고소하게 태운 버터 향에 상큼한 레몬 맛이 더해져 느끼함없이 산뜻하다. 깨물자마자 따끈한 과즙이 흐르는 체리 토마토가 새콤함을 더해주고, 허브의 신선한 향도 언뜻 느껴진다. 칼칼한 맛도 있어 물리지 않고 다 먹었다.
계산하려는데 직원이 어디 출신이냐 묻는다. 한국이라 하니 ‘근데 지금은 여기 살고 있는거지?’ 한다. 종종 듣는 질문이다. 잠이 덜 깨 나온 내가 여행하러 온사람으로 안보였나보다.
여기 살진 않지만 관광객은 아니다. 이 도시를 수십 번 오갔고, 내일이면 또 돌아간다. 언뜻 동그랑땡을 닮았지만 동그랑땡은 아닌 크랩 케이크같다. 그렇게가끔 내가 그 사이 어디쯤 끼어있는 듯했다.
한국엔 한 달에 팔 일 남짓만 있다. 한국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도 출발 전 날이면 은연 중에 내일 또 떠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외국에 나가면 이리저리잘 돌아다녀도 한국이 그리웠다. 음식도 그렇다.
크랩 케이크를 보다 엄마 동그랑땡이 먹고 싶듯 외국 음식을 하루만 내리먹으면 곧 한식이 먹고 싶다. 크랩 케이크를 보다 동그랑땡을 떠올리듯 청개구리같이 지금 여기 없는 걸 생각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그 순간에 온전히 있는 적이 잘 없었다. 외국에 나가서는 한국 생각, 한국에 있을 때는 내일 떠날 비행 생각. 말로는 감사한 점도 많아,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야지. 했지만 체류지에서 더러 지금 이렇게 시간 보낼 때가 아닌데.. 하고 싶은 일 찾아야 하는데.. 이런 고민에 머리가 바빴다.
원하는 걸 찾지 못하고 시간이 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런 나를 탓하는 마음이 한켠 쌓였단 걸 알았다. 온전히 그 자리에 머물며 그 순간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못한 건, 결국 내 선택 내 시간을 귀하게 여기지않고 나를 아끼지 않는 것과 같단 걸 몰랐다.
일과 생활을 분리하려고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생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일과 회사 생활을, 삶과 따로 놓는 건 어려웠다. 내가 보내는 시간, 하는 일, 있는 환경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어떻게 나를 아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직원에게 ‘아냐. 나 내일 돌아가.’ 답했다.
비행하지 않았던 때가 까마득하게 느껴질만큼 오래된 기분이지만 곧 아예 돌아가.
돌아가지만 예전에 나와 완전히 같지는 않을 거다. 이제는 당연한 것 없이 눈 앞의 한입과 한 사람 한 시간을 천천히 맛보기로 했다. 나의 지금에 감사하는 게 곧 스스로를 아끼는 일이다.
길가에 서 우버를 기다리다 하늘을 봤다.
워싱턴 밤하늘에 노랑 동그랑땡이 하나 박혀있다. 워싱턴에서 보는 달도 한국에서 보는 달도 같구나. 동글고 밝고 크고 환하다. 달은 하나니까 여기서 빌어도 소원은 똑같이 가닿을거다.
워싱턴 길가든 서울이든 지금 밟고 있는 땅에 서 있을 수 있는 걸 감사하게 해달라 했다.
게살 케이크나 동그랑땡, 뭐든 당장 씹는 걸 세상 둘도 없이 맛나게 삼키게 해달라고 했다.
지금 내 손에 쥔 시간이 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똑같이 아끼며 나아가게 해달라고도.
노릇노릇 알맞게 익어 먹음직한 워싱턴 달덩이에 중얼거린 추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