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탄한 졸업을 위해 만족, 인정, 인풋, 아웃풋의 무게중심에 서겠다
오늘, 석사학위논문 프로포절*을 했다.
나는 사범대 출신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교사에 참뜻을 두고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고 수업연구를 하며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교사에 되기엔 부족한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팀플을 하다가 만난 어떤 학우의 말도 한몫했다.
'우리 부모님이 선생님이신데 솔직히 부모는 자식이 자기보다 잘 되길 바라잖아. 난 그래서 행시 치려고.'
그렇게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살고 싶지 않던 어리석고 치기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나의 능력을 가늠하는 습관은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는 자주 학교 대표로 영재교육원 선발 시험을 치러 갔지만 한 번도 붙은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영재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나는 영재교육원에 과거든 현재든 한 번도 소속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재가 아니었다.
특목고 열풍이 불 시절, 외고에 원서를 냈으나 떨어졌다. 동네 일반고에 갔고 외고나 과고에 진학한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대학은 스카이로 가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스카이 아니면 다 실패자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던 나는 좋은 성적으로 명문대에 진학하고도 1학년 때까진 스카이 카르텔 앞에서 종종 기가 죽었다. 최상위 그룹이라고 일컫는, 그런 그룹에 들고 싶었다. 남들이 모두 '우와' 해주는 스펙을 갖고 싶었다.
대학교 3학년 여름, 마지막 기말시험을 마친 후 자취방을 올라가면서 다짐했다.
'어디 가서든 무시당하지 않을 스펙을 갖고 살겠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최고로 잘했으면 좋겠고, 그걸 여러 사람에게, 기왕이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일종의 결핍이었던 것 같다.
선배들이 교사 외에 많이들 선택한다는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전문직이 되면 모두가 '우와'하고 알아주지 않는가. 3-4년의 시간이 금방 흘렀고 시간과 건강을 잃고 불합격, 무엇이든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도전하는 신중함, 그리고 값진 자아성찰을 얻었다. 나는 나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모든 일을 이기고 지는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몇 등일까, 저 사람은 왜 나를 낮춰볼까? 모두 경쟁 프레임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들 만한 생각들이었다. 내가 몇 등인지가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유독 강했던 것 같다.
여러 번의 불합격, 그리고 인생의 1/6~1/7을 투자한 시험을 포기하기로 한 결정은 내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라는 사람을 다시 생각하는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시험 포기를 결정하고 약 한 달간 침대에 누워서 자다가 일어나 앉아서 의미 없이 계속 재생되는 영화를 보면서 한 끼 정도 식사를 하고, 어스름이 질 때면 아무 생각 없이 동네를 한 바퀴 빙빙 돌았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울고 싶을 땐 그냥 울고, 더 자고 싶은 날에는 잠을 조금 더 자 보고, 보고 싶은 만큼 영화를 보고, 매일 산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라는 사람의 짧지 않은 삶을 돌이켜봤다.
돈과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돈? 많을수록 좋고, 명예와 권력은 높을수록 좋다. 그러나 많다와 높다의 기준은 무엇인가? 얼마를 가져야 돈이 많은 것이고, 어떤 자리에 있어야 높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까?
내가 가진/가질 돈, 명예, 권력을 남이 가진 것과 견주어가며 누가 얼마나 더 가졌는지 따지면서 살 필요는 없다! 내 삶의 기준은 나다. 이것이 한 달간 사색한 사람의 결론이었다. 참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을 깨닫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면서 잘하는 일을 찾아가서 엣지있는 커리어를 쌓기로 결심하고 실천에 옮기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인생 달관(?)의 경지에 이른 후, 대학 때 전공을 살려서 경제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시험에 실패한 자가 다시 임용고사라는 시험에 뛰어들자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죄여 오는 느낌이었다. 또, 오랜만에 전공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펼쳤더니 눈앞이 아찔했다. 전공과 다시 친해질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렇게 진학한 자대대학원에서 벌써 1년 반을 보내고 석사학위논문 프로포절을 한 것이다.
솔직히,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 줄 몰랐다.
대학원 생활을 제대로 하는 건 정말 빡셌다. 한 주에 평균 2-300쪽의 논문을 읽고 리뷰하였으며, 한 주에 2-3000자, 학기 말엔 15000자 정도의 페이퍼를 두세 개씩 써냈다. 요령 따위 피우지 않고 모든 텍스트를 여러 번 읽고 과제를 하자니 갈수록 밤새는 날이 많아졌다. 한두 번 오전에 늦잠을 자다가 수업에 늦은 후론 밤에 잘 때 불을 끄지 않았더니 얕은 수면으로 인해 만성 피로에 시달렸다.
좋게 말해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말해 예민한 나는 대학원 운영 시스템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대학원에서는 오찬우가 오찬우로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지도교수님이 누구시죠?"라는 물음을 듣게 된다. 무엇을 하든 매점에서 커피 사고, 상담센터에서 상담받는 일 정도를 제외하고는 지도교수님의 승인이 필요했다. 시간표도 지도교수님의 허락을 맡고 결정했으며, 조교나 강사 자리에 이력서를 내는 일도 지도교수님과 미리 상의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나는 오찬우가 아니라 ㅁㅁ교수님의 연구실에 소속된 12345678학번이었던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놓치지 않고 흡수했다. 그는 대학원에서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내게 하는 말과 행동은 대학원 생활 수칙이자 지침이고 삶의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사실 시스템이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 존경하는 지도교수님도 때때로 격의 없이 학생을 대하다가 말실수를 하는, 어떤 면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학원 공간 안에서는 그가 때때로 자신과 내가 잘 맞지 않다거나, 너는 어떠어떠한 사람인 것 같다는 말을 편하게 건넬 때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많이 앓았다. 가까이에서 보고 지내면서 서로의 민낯을 보게 되었을 때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그러나 나는 그러한 과정을 견디는 일이 어느 순간 힘에 부쳤다.
바이올린을 배울 때를 생각해본다. 처음에는 끼긱끼긱 소리가 나다가 서서히 재미가 붙고 중급 정도에서 한번 큰 고비를 맞은 후 고급으로 올라가면 악기를 다루는 게 편안해진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가까이 지내면서 지기지우가 되는 과정도 바이올린에 익숙해지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다. 나는 스스로 교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중급 단계의 고비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내게는 그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사이를 크고 작은 마찰로 채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그렇게 대학원 밖에서 일을 하고, 대학원은 최소한으로 방문하며, 교수님과의 약속이 있을 때가 아니면 연구실에 가지 않는 학생이 되었다. 어쩌면 대학원 생활에 열의를 잃은 학생이라는 낙인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 내는 마음으로 2020년 상반기를 보냈다.
학위논문도 조금 급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학위논문 주제가 6월 중순에 결정되었고(=교수님께서 허락해주셨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연구에 임한 것이 아니었다. 프로포절 준비 막판에 공을 들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지는 않았다. 그래서 프로포절에서 논패스를 받아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석사라 그런지, 교수님들의 아량이 매우 넓어서 그런지 어찌저찌 패스를 받았고, 이제 정말 학위논문 완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논문을 쓰면서 괴로운 점은 두 가지다.
첫째, 이걸 쓴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단다. 특히 석사논문은, 이걸 써 본 사람들은 고오급 라면받침이다, 나무에게 미안한 일이다, 나중에 석사논문 읽어주는 일이 가장 수치스럽다고 할 정도로 만인에게 외면받는다. 시작도 전에 주변에서 대충대충 하라며 이런 이야기를 잔뜩 해주니, 마음이 가벼워지다 못해 사라질 판이다. 글을 출판한다는 건 읽어주는 사람을 염두에 둔다는 것인데, 읽어주는 사람이 없는 글을 출판한다니... 정말 자원낭비가 따로 없다. 쓰는 데 돈도 안 준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잘 쓰고 싶은데, 보상이 충분치 않을 게 예상되니 '가성비 있게' 잘 쓰고 싶다. 논문을 쓰면서 가성비**를 챙긴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그런데 내 맘 속에서는 자꾸 투입하는 에너지 대비 얻는 게 많은 논문 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적당히 통과할 수 있는 논문을 쓰고 학위를 얻어내자는 심산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나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다. 가성비를 챙긴답시고 최소한의 에너지만 투입하면서 요령을 피우고 있다가 막판에 이틀 밤을 지새우며 발표자료를 다듬고 자료 분석을 했다. 그렇다고 다른 연구실 선생님들은 직장생활하면서 대학원 학위를 따 낼 때 나는 논문에만 매달린다고 생각하니 같은 시간에 더 적은 성과를 올리는 것 같아 아쉽다.
중간발표로 긴장했던 몸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뉘었다. 아직 못 버렸다. 다른 사람과 성과 비교하는 버릇 아직 못 버렸다. 아직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못 버렸다. 다시 돌아가서 논문이 쓰기 힘든 이유를 짚어본다.
이걸 쓴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 써 놓고 생각할 일이다. 아마 다 쓰고 한 달 지나면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가성비 있게 쓰고 싶다? -> 노력 대비 성과가 잘 나올 수 있도록 시간관리를 효율적으로 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게 가성비다. 일은 가성비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아웃풋을 '다른 사람의 평가/인정'에 둘 필요는 없다. 따라서 가성비 있게 노력 대비 논문의 양과 질이 높은 그런 논문 쓰기를 하면 될 일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논문도 쓰는 사람이 부럽거든 직장생활을 하는 것처럼 취업준비를 하고, 브런치를 쓰면 되겠다. 논문을 쓰는 중간중간 느끼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면 아마 2020년 하반기 최고의 걸작이 내게서 탄생할 거다.
2년 전, 살아가면서, 특히 커리어와 관련해서 남이 버는 돈이나 지위와 내가 벌고 있는 혹은 벌게 될 돈, 지위를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칭찬에 목말라하고 같은 시간 동안 남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내기를 바란다. 아직도 삶이 비교와 평가 쪽으로 기울어져있다는 게 느껴진다. 스스로 평탄하지 않은 삶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평탄한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무게중심에 서 있어야 된다.
무게중심에서 도형의 꼭짓점까지 선을 그어 생긴 작은 도형은 서로 넓이가 같다. 젓가락 위에 접시를 올려놓을 수 있는 것도 젓가락이 무게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만족, 인정, 인풋과 아웃풋으로 이루어진 도형이 쌓여서 논문(성과)이 된다고 한다면, 나는 이 도형의 무게중심을 떠받치고서 몇 개월을 살아가도록 하겠다. 교수님의 평가에 지나치게 목매거나, 다른 사람은 돈도 벌고 커리어도 쌓으면서 학위도 얻어가는 것 아냐?라는 생각에 빠지지는 순간 무게중심에서 벗어나고, 내가 떠받치고 있던 도형은 갸우뚱거리다 무너질 것이다. 나는 만족에도, 교수님의 평가에도 쏠리지 않고 그렇다고 이를 무시한 채 혼자서 글을 쓰지도 않고 무던히 무게중심에 서서 평탄~하게 논문 탈고까지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한 장 한 장 쌓아 갈 것이다.***
*프로포절은, 이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계속 진행해도 좋은지 심사하는 일이다.
**인풋 대비 아웃풋. 노력 대비 성과.
***원래는 만족, 인정, 가성비로 이루어진 도형이 쌓여서 논문이 된다고 썼다. 삼각형이 쌓이면 삼각기둥이 만들어지는데 논문은 책이니까 사각기둥이잖나.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가성비를 인풋과 아웃풋으로 나눠서 나타냈다. 왠지 이과생들이 "뭐야, 그럼 당신 논문 삼각기둥임? 반 잘라먹었어요?ㅋㅋ"라고 할 것만 같아서...ㅎㅎ 이과 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