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찬우 Jul 23. 2020

오늘, 다크초콜릿을 먹었다

최종 진짜최종 진짜진짜최종.xls

오늘, 수행평가 채점 결과를 입력하며 다크 초콜릿을 먹었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이 입 안에서 녹으면서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 준 것 같다.


초콜릿을 여덟 알이나 털어 넣은 내막은 이렇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 산출 시기가 다가오면서 수행평가 채점 결과를 입력해야 했다. 보통은 NEIS라는 시스템에만 입력하는데, 우리 학교는 학기 초에 냈던 채점기준표의 채점항목 및 기준에 부합하는 채점 결과를 NEIS와는 별개로 정리해서 제출하도록 한다. 론 학생들이 작성한 활동지가 있다면 그것도 제출해야 한다. 평가에 매우 진심인 학교다.



NEIS에서 다운로드한 엑셀 서식에 열을 몇 개 더해서 학기 초 제출했던 평가안의 평가기준을 추가했다. 두루뭉술하게 써 뒀던 평가기준은 내용을 추가하여 좀 더 명확하게 바꿨고, 하필 '기준 몇 개 이상을 만족하면 몇 점'식으로 정해놓는 바람에 칸에다가 채점 결과를 O/X로 채워 넣어야 했다.


학생들이 꽤 잘 따라와 주어서 각 영역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이 많았다. 꾀를 부려서 셀 안에 O를 입력하고 마우스로 주-욱 당겨서 남은 셀을 채웠다. 일단 다들 O라고 한 뒤 X인 부분만 바꾸려는 셈이었다. 나는야 효율왕! 이때까지만해도 별거아니지만 일을 빨리 하는 나 자신에 조금 취해있었다.


교무실에서 가장 먼저 서류를 꾸려서 부장님께 제출했다. 그게 어제였다.

아싸! 1등으로 끝냈다!! 우등생이 된 기분.

그런데 오늘 학교에 갔더니 부장님께서 찬우선생님? 하고 호출을 하신다. 하하 도장이라도 빠뜨렸나? 정말 도장만 달랑 들고 갔는데, 도장 빠뜨린 건 그저 하찮다. 내가 제출한 서류에는 만족하는 평가항목 개수랑 점수가 맞지 않다는 포스트잇이 예닐곱개 붙어있었다. 그리고 허를 찌르는 한 마디.


"학교..처음이세요?"


0.1초만에 머릿속에서 부장님 언어 번역기가 작동했다.

'왜 이렇게 틀린 곳이 많아요? 채점이랑 점수 입력은 제대로 한 것 맞아요?'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뭐 그리 복잡한 작업이라고 A4 몇 장에 걸쳐 형광색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달고 올 일인지.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제출한 내가 너무 미웠다.



수업을 다 마친 후, 서랍에서 초콜릿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추가로 더 먹었다.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한다!! 초콜릿을 오물거리면서 최대한 집중해서 시험 채점 결과, NEIS 입력값, 상세 채점 결과표를 서로서로 비교하며 여러 번 검증했다. 삼각검증이랄까.

'이젠 틀린 거 없다!'

상세 채점표 인쇄를 누르고 비장한 걸음으로 부장님께 갔다.


"바로 확인하고 가시죠 ㅎㅎㅎ허허"


성격 좋은 부장님께서는 내가 여러 걸음 반복할까 봐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나의 상세 채점기준표를 다시 검토해주셨다. 그리고...


"여기 점수 란에 a는 뭐죠?"


그러게 말입니다.. 숫자가 있어야 할 칸에 왜 문자가 있을까요ㅜㅜ 다행히 그것 하나 잘못 입력한 것이었지만 결국 다시 엑셀을 켜고, 해당 셀에 알맞은 숫자를 입력하고 도장까지 콕 찍어서 부장님께 제출했다. 이제 됐다며 안녕히 가시란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받은 결재!

부끄럽고 씁쓸해서 속으로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아아아악!! 몇 번이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나란 사람 왜 이리 헐랭 할까.



학교 화단에 있던 식물. 줄기 하나에 꽃봉오리, 꽃, 시든 꽃, 열매가 다 같이 열려있다.

집에 오는 길, 나가는 문 옆 화단에 있는 식물 줄기에 꽃, 열매, 열매가 되려는 꽃이 한 데 달려있다.

일은 배워가면 되는 거고, 실수한 건 다시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거라고 되뇐다. 비록 오늘 부장님께 최종, 진짜최종, 진짜진짜최종 파일을 보내고 프린트하면서 쓴웃음을 지었지만, 오늘 한 수업은 꽤 성공적이었다.

어린 개체와 성체가 같은 줄기에 있는 것처럼 나도 일을 할 때 아직 서툰 부분과 그나마 능숙한 부분이 있는 것일 테다.

(그래도 다시는 같은 실수 하지 않으리..!!!)


끝!! -진짜완전최종final- THE END.

작가의 이전글 오늘, 학위논문 프로포절을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