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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Jul 17. 2020

오늘, 김밥을 먹었다

자기 검열과 권력은 반비례한다

오늘, 김밥을 먹었다.

오늘은 고등학교 시험기간이라 시험 감독을 마치고 학교 문을 나설 땐 대략 10시 30분이었다.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갈라진 입가와 올라오는 각질로 잠시 불편하다.

'비타민 B가 부족하구나'

약국에 가서 들었던 지식으로 대충 때려 맞혀 본다.



점심으로 비빔국수를 먹을까 하다가, 야채김밥으로 선회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서양 근현대사 교양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 학교에는 참치 김밥으로 매우 유명한 매점이 있었는데, 학교 사람들이 쉬는 시간마다 줄을 1~2m씩 서서 김밥을 사 먹었다. 점심때쯤 진행되었던 수업이라 김밥을 들고 교실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고, 쉬는 시간에 먹다 남은 김밥은 포장의 플라스틱 뚜껑을 잘 닫아서 책상 위에 놔두곤 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이 김밥을 그렇게 많이 먹는 게 신기하셨나 보다. 김밥을 어쩜 그렇게 좋아하냐며, 좀 더 건강한 한 끼를 먹으라고 조언하셨다. 학생들은 '김밥이 그나마 건강한 거라 먹는 거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더니 김밥은 사실 염분이 너무 많고, 단백질이 너무 부족하지 않냐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한 잔 마시고 땡! 하는 것보다는 김밥이 나은 듯하니 알아서 잘 판단하여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씀으로 마무리 지으셨었다. 젊어서 먹은 게 평생 체력이 되는 거라며....

내 기준에서 봤을 때 김밥이나 샌드위치는 완전식품이다. 김밥 안에 있는 지단은 단백질 아니던가? 샌드위치 안에 있는 햄도 마찬가지다. 그럼 된 거다. 염분이 많으면 물 많이 마시면 될 일이다.


야채김밥은 집 근처 프랜차이즈 김밥가게에서 샀는데, 사실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들을 위해 오렌지주스와 김밥을 간식으로 제공해줬었다. 같이 일하는 시간강사님께서 저 간식 우리도 먹자며 나를 간식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런데 차마 그 김밥에는 손을 댈 수가 없더라. 일정상 오늘 학교 식당이 운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구입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고, 주스와 김밥을 쥔 강사 선생님이 무안할까 봐 "저는 곧 점심을 먹을 거라 오렌지주스만 하나 먹을게요"라고 말했다. 점심 대신 구매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출처와 목적이 확실하지 않으면 완벽한 내부자가 아닌 나(*나는 이 학교에서 현재 주 6시간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로서는 이런 부분이 신경이 많이 쓰인다. 나도 먹어도 되는 건가? 나도 써도 되는 건가?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나의 이런 태도가 다른 강사 선생님을 불편하게 만든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오렌지주스만 마시기로 타협을 봤다.



'나도 먹어도 될까?', '나도 써도 될까?', '이렇게 하면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냥 진행했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내가 혹시 말실수는 했나?'

이런 질문은 종종 나 자신을 작아지게 만든다. 그 누구도 쓰지 마라고 한 적 없고, 하지 말라고 한 적 없고, 나는 가르쳐줄 것이 없으니 알아서 잘해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혼자서 나의 행동을 검열하고, 내 행동이 불러올 파장을 걱정한다. 혹자는 이런 사람은 애초에 마음의 체가 너무 촘촘해서, 즉, 밴댕이소갈딱지에 소심쟁이여서 아주 작은 일에도 휘둘리는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교실에 들어가서 선생님의 입장에 서면 아이들이 내게 어떤 질문을 해도, 그것이 성적인 것이나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을 묻는 것이 아니라면 통 크게 질문을 듣고 대답해줄 수 있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는 나, 그래도 내가 밴댕이소갈딱지 소심쟁이인 걸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심하고 걱정이 많아지거나, 대범하게 넘기거나. 이 태도의 차이는 내가 가진 권력의 차이에서 오는 거다. 시간강사로 일을 하면서 완벽한 내부자에 속하지 못하고, 정보를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느리게 받으며, 학교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을 경력이 많은 교사에게 물어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혹시 내가 전해 듣지 못한 정보가 있는 것인지, 매일 출근하지도 않는 나도 간식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지도교수님과 대화를 할 때, 지도교수님께서 내가 한 카톡에 답장이 없으시면 답장이 올 때까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왜 답이 없으실까? 카톡으로 보내면 안 되는 내용이었던 걸까?'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고, 이런 게 사회생활하면서 느끼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일 것이다.


내가 선생님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과제 채점 결과를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보내줬는데 답이 없다? 그냥 그렇구나~바쁜가 보다~ 하고 넘어가거나, 내일 가서 잘 받았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지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인지 검열하지는 않는다.


결국 자기 검열 여부나 정도는 관계에서 내가 가진 권력의 차이로 결정되는 것 같다.

평가받는 입장이거나 집단에서 나의 위치가 주변인, 외부인에 머물면 자꾸 나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게 된다. 상대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된다. 왜, 짝사랑을 할 때도 연락 후 답장이 안 오거나, 대화를 걸었는데 퉁명스러운 답이 오면 마음이 아프고 상대의 눈치를 보게 되지 않나. 사회생활도 결국 같은 이치인 것이다.


고로 대학원생이자 시간제 직장인인 나는 권력의 거의 밑바닥에 있는 존재로, 사회생활에 첫 발을 디딘 이 시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나의 말과 행동을 자꾸 깨 씹게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학교에서 주는 김밥은 안 먹는 게 나았겠지? 오렌지주스도 먹지 말았어야 했을까? 좀 궁금하더라도 교수님께 질문은 하지 말아야 했던 걸까? 이런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건 쪼렙의 숙명인 것이다.

누군가는 염분이 많고 단백질이 부족한 음식이라고 말했던 김밥을 먹으면서도 '야채 풍부하고 좋지 뭐. 염분 많으면 물 먹지.'라며 의연할 수 있는 내가 진짜 나다. 파워를 축적하고 레벨업을 하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을 게다. 힘내자. 파워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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