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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Jul 17. 2020

오늘, 카라멜 마키아토를 마셨다.

인생은 과거와 현재의 커피타임


오늘, 카라멜마키아토를 마셨다.

커피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메리카노나 드립커피 위주로 마신다.

더한다면 기껏해야 우유 정도. 우유에다가 시럽까지 더해지면 왠지 속은 기분이다. 달달한 것을 원한다면 차라리 바닐라쉐이크를 마시는 편이 낫지, 커피에 우유와 시럽을 넣어 마시는 것은 커피를 감추는 느낌이다.

'여기엔 독이 없어 한번 마셔 봐'.


학위논문 중간발표를 앞두고 불안감이 번졌다.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글을 읽고 써야하는 시기지만, 위기감이 너무 고조되어서 일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뇌에게 '괜찮다' 라는 신호를 줄 필요가 있었다. 가장 빠르게 기분 좋아지는 방법, 디저트를 먹으면 된다. 보통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이나 바닐라쉐이크를 먹는 편이나, 이번에는 괜시리 카라멜마키아토를 마시고 싶었다.



    내가 처음 카라멜마키아토를 마신 건 고3 때다. 요즘에는 아파트 상가에도 브랜드 커피 전문점이 두세개씩 입점해있을 정도지만, 10여 년 전에는 음식거리, 카페거리 등 번화가 위주로 에스프레소 전문점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을 때였다. 나는 커피를 매우 좋아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는데, 평소에는 매일유업 카페라떼를 들짝으로 사두고 하루에 두 개씩 마시다가, 시험기간이 되면 독서실 옆에 있는 핸즈커피라는 곳에서 카라멜마키아토를 사 마셨다. 시험을 앞두고 불안을 잠재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나만의 포션이었던 셈이다. 밤 10시에 학교에서 나와 엄마차를 타고 독서실로 이동한 뒤, 카페로 들어가서 카라멜마키아토를 테이크아웃하는 나를 처음 봤을 때, 우리엄마는 커피에 어떻게 돈을 밥값만큼 쓰냐며 꾸짖었다. 용돈 줬음 소비는 나의 몫이라는 논리로 개의치않고 꿋꿋하게 시험 3일~1일전에 늘 핸즈커피에 들러서 카라멜마키아토를 사서 마셨더니, 나중에는 대구가 대구했던 여름날 엄마가 덥더라도 힘내라며 비타민음료와 카라멜마키아토를 학교에서 공부중인 내게 주고 가셨다. 그걸 들고 교실에 들어갔을 때, 강양이 "우와 너무 좋겠다! 엄마가 커피도 막 사주고 가고!" 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의 격려가 부러웠던 것인지, 카라멜마키아토가 부러웠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카라멜마키아토는 힘든 공부를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포션'이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관찰력이 좋았던 나의 친구 깽이는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한 뒤에도 나의 생일을 챙겨주었다. 그때 당시 신문명(?)이었던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스타벅스 과일주스 쿠폰을 주곤 하였는데, 내 생일은 항상 대학 시험기간이었으므로 그 쿠폰은 카페인 섭취를 줄였으면 하는 깽이의 바람과는 달리 카라멜마키아토를 사는 데 쓰였다. 주로 밤 10시 즈음에 스타벅스에 가서 아이스카라멜마키아토를 샀다. 컵 홀더를 끼우지 않은 카라멜마키아토와 이제는 사라진 초록색 플라스틱 빨대를 들고 하숙집 방으로 들어가서 샤워를 한 후 의식처럼 커피와 물 한 컵을 책상에 세팅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전공과목이나 교양과목 벼락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새벽3시까지 공부하고 혹시나 잠에서 깨지 못할까봐 불을 켜 놓고, 알람을 맞춘 휴대폰을 머리맡에 둔 채 쪽잠을 자곤 했다.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마치 어떤 약에 취한 것처럼 공부에 온 에너지를 쏟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스스로 너무 열심히 사는 건가 싶어서 옆을 돌아보면, 그냥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아, 이게 대학생의 삶이구나.'. 깨달음을 얻는 데까지 2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24살부터는 커피를 마셔도 시럽이 들어간 커피는 잘 마시지 않게 되었다. 이 시기엔 원두별로 커피맛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원두를 사서 드립커피를 내려마셨다. 브라질,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에티오피아, 블렌딩한 원두 등등 전광수 커피나 원두를 볶아서 판매하는 개인카페에 들르는 날이면 원두를 조금씩 사서 모았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보내는 낮과 밤에는 그냥 무조건 싸고 쓰고 잠 잘 깨워주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오랜 고시공부로 나이는 들어가는데 아직 경제적 자립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학교에서 파는 1500원 아메리카노 값도 때론 부담스러웠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카누를 구입해서 들고  다니기 시작하였고, 이마저도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서 베트남 인스턴트 커피 G7으로 갈아탔다. 돈이 부족하지만 커피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나였다. 잠을 깨워주는 것은 물론, 왠지 커피를 마시는 행동이 나의 불안감을 잠재워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카페인으로 인해 감정 기복이 심해질 수 있는데, 커피는 나에게 원인모를 안정감을 주는 '포션'이었다.



매일 아침 포션을 하나 사용하고 집을 나선다. 매일 아침 날짜와 시각이 나오는 책상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출첵 스터디 오픈카톡방에 올리고, 다시 책상에 커피 한 잔과 물 한 잔을 올려둔다. 커피와 물을 한 모금씩 마시고나면 나의 치열하지만 평범한 하루가 시작된다. 그러나 게임을 할 때 캐릭터에게 항상 똑같은 포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듯, 좀 강력한 포션을 사용해야하는 순간이 있다. 석사학위 프로포절을 앞둔 오늘이 그런 순간이었다. 옷을 챙겨입고 마스크를 쓴 뒤,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가 잠시 메뉴판을 바라봤다. 불안하지만 이를 억누르고 쉼없이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상태. 시험 때마다 카라멜마키아토를 찾아 마시던 때가 떠올랐다. 고생스럽게 그러나 억척스럽게 수험생활을 하던 고3인 나와 함께 고생했던 엄마생각이 났다. 카페인 제발 끊으라며 생일 때마다 각종 과일주스 기프티콘을 보내주던 깽이 생각이 났다. 스쳐지나가는 추억들. 그래,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거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나의 학생시절은 과거와 현재의 커피타임이다.

- 따뜻한 카라멜마키아토 한 잔 테이크아웃이요


다 큰 어른이 되었지만 힘든 순간 불안감을 잠재워주고 위로가 되어주었던 카라멜마키아토 한 잔을 찾았다. 더운 여름날 수능 공부 힘내라며 그렇게 비싼 커피를 사서 마신다고 구박하던 엄마가 특별히 챙겨줬던 카라멜마키아토, 시험 한 번 잘 봐보겠다며 카페가 문 닫기 전에 가서 주문해 마시던 음료. 포기하고 싶은 마음보다 꼭 목표한만큼 다 공부하고 시험을 보겠다는 포부가 더 컸던 그 때가 떠오르는 음료. 나는 잦은 실패로 주눅들어서 더이상의 실패를 피하고싶은 마음이 커져버린 이 불쌍한 어른아이에게 카라멜마키아토를 주입했다.


쓴맛으로 괴로운 삶, 순간이지만 극강의 단맛이 쓴맛을 잠시 잊게 만드는 맛. 그리고 쓴맛에서 나오는 각성효과. 논문 중간발표를 회피하고 싶었던 그 순간,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이었던 과거와 오 사원이 아닌 오찬우를 위해주는 사람들의 응원을 들이켰다. 추억을 빌어 버텨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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