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의 휴대전화에서는 매일 6시 30분에 알람이 울린다. 주연은 이때부터 10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을 최소 5번은 더 연장한 뒤에 가까스로 일어나 부은 눈을 물로 적신다. 커리어가 양지에서 싹을 틔우려다 사지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시각은 7시 35분이다. 7시 35분을 넘겨서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 종로에 있는 사무소까지 가는 길이 한참 밀린다. 서울살이를 하면서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데 잠을 더 자는 일은 그나마 돈이 들지 않으니 이 시간을 좀더 즐기고 싶다만, 창작을 할 줄 알아서 어디서 인세 수익이 턱턱 들어오는 것도 아니요, 건물 주인씩 되어서 월세가 착착 꽂히는 것도 아니라 분수에 맞게 절제한다.
아침 준비 시간을 줄이기 위해 K-pop 댄스 음악을 틀어놓는다. 주연은 몇 년 전, 학교 앞 하숙집에서 샤워를 하다가 바퀴벌레가 자신의 엄지발가락과 비누를 사이에 두고 까꿍했던 일을 떠올리며 화장실 슬리퍼를 주워 신고 샤워기를 튼다. 샴푸를 꾹꾹 눌러 짜고 머리를 박박 문지르며 어제 들어온 추석 상여금에 대해 생각해본다.
주연은 통계청의 3개월짜리 프로젝트에 고용된 계약직 연구원이다. 시간제 연구원(말이 좋아 연구원이지 사실은 통계 및 복사 알바다) 시절에는 계약서상 주 14시간 노동하는 시간제 연구원 일을 3개의 기관에서 했었고, 시급이 차곡차곡 밀리지 않고 들어오는 일에 감사했다. 시간제 연구원 경력을 쫌쫌따리 모아서 주 5일 일하는 계약직 연구원으로 승격되고 나니 주휴수당은 물론 상여금도 준다. '아니, 이거 일자리만 잘 구해지면 계약직으로 계속 살아도 되겠는데?' 라는 대출받을 일 없을 것처럼 세상 살던 때도 잠시, 몇 달 전에는 은행의 전세 대출 거절에 무너지고 어제는 정규직 연구원과 상여금 차이에 쓰라렸다. 비슷한 시기에 주연과 함께 일을 시작한 신참 정규직 팀원은 급여의 150%를 상여금으로 받을 때, 주연은 50%를 받았다. 그나마 챙겨줘서 감사해야 할 일인 건지.
'정규직과 계약직에 차이를 두는 것은 당연하다, 급여 격차와 은행에서의 대우야 말로 내가 정규직 연구원으로 가야 할 이유다! 와신상담!'
주연은 스스로에게 강해지라고 되뇐다.
-- 휘이이이이이잉
드라이기와 선풍기를 동시에 틀어놓고 머리를 말리면서 습관처럼 스마트폰으로 취준 카페를 들어가봤다. 통계직렬의 취업 전망이 좋을 거라는 말에 통계학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단위의 계약직을 뽑는 곳은 많지만 은행에서 대접받을 수 있는 정규직은 이미 채워질 대로 채워졌는지 씨없는 수박에서 씨 찾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정규직을 뽑는 곳들도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실무경력자를 우대하고 그 중에서도 필기시험과 면접을 잘 본 사람을 뽑겠다는 식이다. 책으로 공부도 하고 실무 경력도 경력대로 쌓으란 소리다. 그렇게 통계학과를 나온 사람들은 주연처럼 시간제 알바, 계약직 연구원을 하면서 정규직 풀에 들기 위해 버틴다.
집을 나서는 길, 주연은 새삼스레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거듭해야 하는 이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프롤레타리아라면 누구나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시대를 타고났을 뿐이라고.
사람과 경쟁하는 것을 넘어 기계와도 경쟁해야 할 판인데, 주연은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래도 바퀴벌레와 안녕하고 옆사람이 남친과 밤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밖에 없었던 대학 시절보다는 나아지지 않았는가? 22제곱미터에 커튼을 걷으면 사람과 까꿍하는 초근접 시티뷰의 빌라라도 편히 한 몸 뉘일 수 있지 않은가. 소속이 있고, 할 일이 있으니 행복한 것 아닐까.'
8시 35분, 주연은 아직 덜 마른 머리를 한 손으로 빗으며 지하철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틈에 몸을 실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며 보이는 다른 사람의 스마트폰 화면에서 "직장만 다녀도 상류층, 중산층이 붕괴됐다"**라는 글씨가 크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