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보는 나의 노력
파수, 슈프리마, 라온시큐어를 거치며 국내 보안 기업들에서 일하다 보니, 업계에서 자연스럽게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 있었다. 글로벌 보안과 네트워크 시장을 상징하는 회사, 시스코였다.
본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고 삼성동에도 지사가 있는 회사. 포춘지에 ‘일하기 좋은 회사’로 매년 소개될 만큼 잘 알려진 글로벌 기업이라, 언젠가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것 같다. 쉽지 않겠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한 번은 두드려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2020년 겨울이었다.
이력서를 꽤 공들여 정리해 샌프란시스코 본사로 지원했다. 검토 기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그 사이 회사 안팎으로 여러 고민들이 겹쳐 있었다. 몇몇 국내 중견기업들로부터는 합격 연락도 받고 있었지만, 시스코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시스코였다. 서류 스크리닝을 통과했고 1차 면접을 진행하자는 연락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그때부터는 다른 선택지들은 잠시 내려두고 시스코에만 집중했다. 시스코코리아 마케팅 디렉터와의 1차, Cisco APJC 책임자와의 2차, 호주에 있는 매니저와의 3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사에서 진행된 최종 4차까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지원자 수가 꽤 많았고,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면접 준비에 쏟아부었던 것 같다.
최종 결과를 기다리던 시기, 집에서는 지금의 아내—당시 여자친구와 사소한 일로 살짝 다툰 상태였다. 괜히 공기도 싸했고, 서로 말도 많지 않았던 날이었다. 그러다 시스코에서 전화가 왔다. 최종 합격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붙었다!”고 소리를 질렀고, 그 순간 둘이 아무 말 없이 끌어안고 웃으면서 그냥 풀렸던 장면이 아직도 또렷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리 부부다운 순간이었다 ㅎㅎ
2021년 2월, Grade 9을 부여받고, 블루 배지 사원증을 달고 아셈타워로 첫 출근하던 날도 잊지 못한다.
‘아, 내가 진짜 시스코에 왔구나.’
매번 중소·중견기업만 다니던 나에게, 아버지가 처음으로 “잘했다”라고 말해줬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물론 당시에는 팬데믹이 한창이라 본사로 이동하지 못하고, 본사 소속으로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는 형태였다. 조직과 시차, 역할 사이에서 조율해야 할 일도 많았고 솔직히 쉽지 않은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앞으로 다시는 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을 것 같다.
그만큼 특별했고, 또 많은 걸 배웠다. 얼마 전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그때 주고받았던 서류와 메일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됐다. 지금의 내가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그 결정 하나가 모든 걸 바꿨다기보다는, 지금의 나를 이루는 중요한 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때로 돌아가면, 스타트업 지분 제안 및 이직 제안에 넘어가지않고, 한 3~5년 진득하게 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는 지금의 일터에 만족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