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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Dec 02. 2019

 기이한 얼굴로 돌아보라

영화 <미성년>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게 될 것이다. 이 자명한 진리는 언제라도 일상의 등 뒤를 찌를 듯 날이 서있다. 멀쩡히 살다가도 뒷통수를 맞는 일은 우연히 벌어지지만 그래서 사실은 필연적이다. 삶은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삶이 뒤집어지는 순간을 함께한 다섯 사람이 있다. 영화 <미성년> 속 불륜을 저지른 대원(김윤석)과 미희(김소진), 그리고 그보다 더한 미희의 임신 소식은 대원의 아내 영주(염정아), 그의 딸 주리(김혜준)와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를 기묘한 인연으로 한데 묶는다. 주리와 윤아는 죽일 듯이 싸우고 영주는 미희의 배를 보며 설움에 쌓인다. 이제까지 안면도, 연고도 없었던 깨끗한 과거사만큼이나 서로를 마음껏 원망하고 미워할만하건만 삶은 그들을 순순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미희가 아기를 조산했고, 인큐베이터 속을 함께 바라보며 윤아와 주리는 어른들이 방치하는 이 사건을 수습해보기도 한다. 등장인물 중 가장 작은 생명의, 아주 짧은 삶의 길이를 목도하는 이 소녀들의 시간은 어른들의,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폐부를 찌른다.



  불륜의 이야기이며 영화 속 어느 누구도 삶의 추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미성년>의 도식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누구 하나의 감정도 관객의 손바닥 안에서 놀림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순간 인물들이 터트리는 웃음과 울음은 지켜보는 이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이 난처함은 그간 우리가 길들여져왔던 한국 대중영화의 관습에서 비롯한다. 단층적인 감정의 회로를 동원한 정서로 하여금 삶의 치열한 순간들을 함부로 퉁칠 수 있었던 대중영화들, 그가 동원하는 막장 드라마의 도식을 돌아보라. 간편한 시선, 단순한 해결구도가 관객들에게 안겨준 쉽고 빠른 즐거움에 영화 <미성년>이 드는 반기는 조금 특별하다. 영주가 자신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그 작은 머리를 부감으로 잡는 카메라 시선을 상기해보자. 인물이 내뱉을 수 있는 독백까지 샅샅이 들을 수 있는 존재, 드라마는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다. 전지전능할 수 있었던 우리가 너무 쉽게 ‘안다’고 말했던 감정선에 반하여 영화는 신과 맞서는 존재인 유령과 인간을 배치한다. 세계의 틈새를 열어젖힐 수 있는 유령 같은 소녀들과 인간이 가장 잘 구가할 수 있는 기묘한 표정들의 공존은 영화를 두고 완전한 감상에 쉬이 마침표를 찍을 수 없게 만든다. 



  소녀들과 어른들 사이를 가장 명확하게 긋는 선은 다름 아닌 ‘죽음을 목격해봤고, 그것에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아기가 죽을 줄 소녀들은 모르고 있었고, 어른들은 알고 있었기에 그 가련한 생명을 충분히 회피할 수 있었겠지만, 죽음을 아직 목도한 적이 없는 그 시기를 지나며 윤아는 남동생을 둔 누나가 되고, 주리는 윤아의 친구가 된다. ‘미성년자’들이 앞뒤 분간할 수 없이 들입다 질주하고 있는 삶은 살아있는 생과 동시에 맞닿아있는 죽음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수습의 방식은 아기라기보다 태아의 형태에 가까운 미완성의 아이에게 가장 인간다운 얼굴을 부여한다. 아기가 죽기 전 날 밤 태동하며 웃음을 짓는 듯 마는 듯한 미묘한 표정은 아빠와 엄마 중 누굴 더 닮았나 분간할 만큼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을 본 모두가 아이의 생을 기억할 것이다. 죽은 자들은 그렇게 살아있는 자들의 애도를 받는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기억하며 삶과 죽음은 생의 경계를 넘어 교차한다. 선을 긋고 그 선을 마음껏 넘나드는 소녀들은 그러므로 유령과도 같다. 그 소녀들의 뒤를 마음껏 밟고 있던 영화의 관객들의 위치 또한 모호해진다. 



  교차하는 생과 사만큼이나 참으로 치열한 영화 속 얼굴들 또한 멜로드라마와도 같던 영화의 도식을 무화시키는 존재들이다. 영화의 맨 처음 불륜의 당사자인 미희와 목격자인 주리가 맨 처음부터 마주치는 설정은 짓궂기까지 하다. 영화가 진행되고 이들이 만남을 거듭할수록 영주의 딸 주리가 미희와 엇비슷한 표정을 짓고, 미희의 딸 윤아가 영주와 교감한다. 얼굴은 서로를 알수록 닮아간다. 애초에 어떤 사건으로, 어떤 분노로 마주했던 얼굴이었는지는 점점 희미해져간다. 영화 후반부 영주가 미희의 병문안을 왔을 때 자꾸만 위로를 강권하던 장면에선 가해와 피해가 뒤섞여 들어가는 아이러니의 최정점을 찍기까지 한다.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있었던 인간사는 그간 모두 착각이었다며 영화가 말한다. 또한 이들이 구가하는 권선징악에서, 가장 명징한 처벌을 받는 자는 다름 아닌 중년 남성 대원이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가장 먼 동선을 가진 이 남성은 아기의 탄생과 죽음, 그와 더불어 한 몸으로 엮인 영주와 미희를 끝까지 외면하는 자로서 얼굴과 표정의 행방은 잃어버린 자이다. 아무 곳도 갈 수 없는 이 남자가 줄줄 읊는 자가변명이 우스꽝스럽지만, 변호의 여지 또한 되어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사연과 처지에 몰입하고 있는 강자를 애써 포장하지 않으려는 카메라는 참으로 냉정하다.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하는 순간, 영원히 살 것만 같던 이 지옥도도 끝이 난다. 최후를 알게 된 이후부터 삶의 유한함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기 때문이겠다. 계속 살되, 피가 돌고 살이 차오르는 육체를 들여다본 주리와 윤아, 그리고 관객들에게 전지전능하고 참으로 쉬운 전개였던 그간의 드라마가 헷갈려온다. 죽은 자들과 언젠가 죽을 자들이 일으키는 반란에 신의 놀이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더불어 인간적이며 가장 모순적이기까지 한 영화 <미성년>의 방법론, 그가 말끔하게 웃고 최선을 다해 울던 한국 상업영화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시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영화 문법이 안주하고자 하는 숱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다시 아기처럼 태동하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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