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본 영화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지 Apr 26. 2020

복이 있는 자에게 웃음이 있나니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웃는 자에게 복이 있다더니, 웃기도 민망한 진퇴양난이 주인공 찬실이(강말금)를 덮친다. 함께 술자리에서 하하호호 놀던 영화감독은 갑자기 죽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이제까지 찬실의 청춘을 바친 영화라는 밥줄이 끊긴다. 길이 없어지자 우리의 주인공은 갈 데 없이 헤맨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집을 세들어 동료 배우 소피의 집을 청소하는 아르바이트를 겸하고 마음가는대로 좋아하는 남자도 생긴다. 그런데도 찬실은 끊임없이 공허함을 느끼고 외로워한다. 자신이 속할 만한 위치는 여기가 아니라는 듯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한다. 여기 있는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아픔. 그 당연한 아픔이 어느 날 감기처럼 찬실이를 찌를 때, 찬실이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무엇 문에 살았고 또 지금은 왜이리도 외로운지. 그리고 그 삶의 질문 대부분은 찬실이 온몸바쳐 사랑한 영화라는 공간 안에서 맴돈다. 그렇다. 이건 영화를 사랑하고 증오하는 감독의, 감독에 의한, 감독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자신이 빚은 영화에 스스로 던지는 헌정사 같은 것이다.



  그 무수한 질문을 뚫고, 영화 속에선 꽤 많은 '낭송'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글귀들. 그리고 그 글귀나 대사를 읽어내려가는 목소리말이다. 세들어 사는 집주인 할머니가 떠듬떠듬 읽어내려가는 찬실이 아버지의 편지, 그리고 다시 그것을 고쳐 읽어가며 사실 찬실이의 영화가 지루하고 어려웠다던 아버지의 고백, 어느 날 소피의 서재에서 찬실이가 발견한 시구, 그리고 집주인 할머니가 학교에서 받은 숙제로 지은 시.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공간 안에서 모두 주인공 찬실을 가리켜 존재한다. 질문을 던지는 찬실이 앞에 파편적으로만 보이던 각기각색의 구절들이 모여 답변이 된다. 이구동성으로, 누구나 곧잘 외칠 수 있는 표어가 아니라, 그러니까 순간의 결과가 아닌 삶의 과정으로 쌓여가는.



  영화에서 귀신인지, 찬실의 상상인지 모를 장국영 캐릭터는 그래서 필연적이고 필수적이다. 자의든 타의든 찬실에게 내리꽂히는 세간의 시선들, 평가들로부터 그녀를 감싸주고 답변을 찾아가는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건 바로 이 장국영이다. 이윽고 찬실이 외로움의 근원을 알았을 때 입맞추고 홀연히 떠나가는 그 뒷모습은 찬실이가, 감독 김초희가, 그리고 영화를 어떤 연유에서든 보게 된 우리들의 영화를 연상케 한다. 이 은유법이 단순하고 유치한 직설인지, 한도 끝도 없는 성찰인지는 사실 영화의 몫이 아닌 것 같다. 찬실이의 손을 떠난 깨달음이 최종 목적지에 완전하게 달하는 장면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 것처럼 결국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사랑하고 사랑했고, 그 사랑을 정리하는 사람들마저 모두 사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말미에, 다만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찬실이 등장하는 게 아닐까. 결국은 우리 또한 과정이고 진퇴양난 속에서도 이 사랑을 쥐고 놓칠 수 없기 때문에 찬실에 이입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대상이 꼭 영화가 아니어도 좋다. 목적지도 없는 고행임은 너와 나 모두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사람과 웃는다,가 영화의 결말이라니. 복 받으라는 말은 그러니까, 끼니 거르지 말고 챙기란 인사와도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인사치레에서 나아가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안부와도 같다. 매일 살아가는 일상에 견주어 거창하지도 않고도 밤 되면 잠 오고 아침 되어 눈을 뜨는 순환만큼 자연스러운 덕담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나만 챙길 수 없는 코미디 각본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