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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Nov 02. 2023

가엾은 내 사랑과 빈 집에 갇히는 일

<노란문 :  세기말 씨네필 다이어리> (2023)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3년. 지금은 나이 지긋한 중년이 된 어떤 이들이 한데 모여 대학생활을 회고 한다. 한 방에 둘러앉아 같은 영화를 보고 다른 이야기를 숙덕거리던 젊은이들은 21세기가 되어 화상채팅을 통해, 각기 다른 장소에서 기억을 더듬고 이야기를 공유한다. 90년대 연세대학교의 영화 동아리 ‘노란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멤버 중 한 명은,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영화감독 봉준호다.





  세계적인 영화감독의 회고록, 쯤으로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면 영화를 보는 도중 아주 색다른 문 하나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영화동아리의 이름이자, 동아리의 멤버들이 열정적으로 영화를 보고 토론하던 공간이자 시간이 되어준 '노란문'이 그것이다. 노란 문이 열린 시간과 그 안에 머문 시간, 그리고 문이 닫힌 시간과 다시 열린 시간 모두 이 영화 안에 녹아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끊임없이 젊은이의 양지에 데려다주는 원동력은, 젊은이와 덕후 모두가 가지고 있는 '집착'이라는 이름의 체력이다. 





  다시 2023년으로 돌아가,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자리에서 화상채팅을 켠다. 영화를 보고나서, 아무것도 모르기에 나눌 수 있었던 가장 선명한 지식을 논하던 그때처럼 마리다.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대담할 수 있었던 젊은이들은 지금은 결코 선연하지 않은 그때의 기억을 더듬고 공유한다. 기억은 '맞아, 맞아'라는 맞장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누나가 그랬던가?'라는 질문을 불러올만큼 한참 엇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잡지에 영화평론을 올렸던 이름 ‘구회영’이 ‘구십년대를 회고하는 영화광’의 준말이라던 증언은 당사자에 의해 틀린 것으로 밝혀진다. 당시 작자의 곁에 있던 신문 부고란 속 ‘구영회’라는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필명에 대한 진위 여부처럼, 조금은 불완전한, 그러기에 마냥 행복한 웃음이 이어지는 '그때 그 시절'은 깨지고, 붙이고, 이어진다. 





영화 속에서 누군가 증언했듯, ’어딜 가야 할지 모르는 고릴라‘ 같은 시간을 견딘 90년대의 젊은이들. 누군가의 시기를 혹자는 엘리트들의 질펀한 취미생활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열렸던 문은 시간이 흘러 닫히고 만다. 영화의 시기가 끝나가는 것처럼, 혹은 대학가 지식인들의 전성기가 저무는 것처럼. ‘이내 손을 잡고 걸었던 이와 손을 떼야만 할 때 밀려오는 잠깐의 뻘쭘함’, 혹은 ’불만‘, ’섭섭함‘ 등이 쌓여 문은 닫히지만, 결코 어쩔 수 없거나 누군가 강제하는 것이 아닌 '그럴 때가 왔기에' 시간은 끝이 난다. 노란문의 멤버들의 노란 문은, 좋았던 시절을 끊어내지도, 이어가지도 않은 채 그렇게, 언제든 열 수 있지만 굳이 열지 않아 벽이 되고야 만다 (이 은유는 봉준호의 영화 <설국열차>에 또한 등장한다)




잊혀진 별명이 걷히고 드디어 노란문에 대한 모든 걸 털어놓은 역대 멤버들의 인서트가 등장한다. 엔딩 속 회원들의 옆자리엔, 그들이 현재 업으로 삼고 있는 일 혹은 이름이 적힌다. 지금의 ‘별명’ 또한 노란문이 그러했듯, 결국 또 세월의 힘에 의해 걷히고 바래지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즐거웠던 찰나의 순간에 기대어 사는 것이라며, <노란문>은 다시 그 노란 문을, 기꺼이 열어버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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