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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Feb 16. 2019

어쩌면 가장 여자다운 도전기

tvN 예능 <할리우드에서 아침을>



영화를 본다. 혹은 드라마를 본다. 다큐멘터리나 특별한 시도가 아닌 경우에 대다수의 극영화를 본다는 것은 극 중 인물로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을 본다는 것과 매한가지다. 스크린 혹은 TV 액정 위로 드러난 그 얼굴이 시청자들에게 각인되고, 출연을 거듭할수록 그가 갖고 있던 패기가 경험과 연륜으로 익어가는 과정은 배우의 이름이 시청자들의 뇌리 속에 특정한 캐릭터와 이미지, 그리고 스토리로 기억되는 순간과 일맥상통한다. 어떻게 소비하느냐의 문제는 곧 어떻게 생산되느냐의 질문으로 넘어가며, 이때 우리는 현 페미니즘의 시류에 따라 영화와 드라마를 막론한 한국 영상 문화 속에서 여성 배우를 특정 캐릭터로만 한정 짓고, 이들의 입지를 함몰시키는 양상과 부닥친다. 여성이 나이 들어 중년이 되고 그가 맡은 '어머니'라는 역할, 어쩌면 이 역할의 전부인 '모성애'라는 키워드가 더 이상 지긋지긋하다며 반기를 든 건 영상 바깥의 소비자뿐만이 아니었다. 촬영 현장에 직접 종사하고 있는 배우들이 직접 입을 열었고 어머니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자 하는 중년 여성들의 행보가 tvN 예능 <할리우드에서 아침을>이란 프로 속에 담긴다. 이번 주 일요일 3화 방송을 앞두고 1화와 2화를 연달아 감상한 소견을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와 흥미를 담아 적어볼까 한다. 





예능에 배우가 출연하여 그들의 본업인 연기를 한다는 포맷이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11년 국민 오디션이라는 유행에 발맞췄던 SBS <기적의 오디션>부터 시작해 2016년 데뷔 27년 차 박신양이 선생으로서 연기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tvN <배우학교>까지. 연기를 행하는 배우의 발성과 표정이 컷 바이 컷으로 분할된다기보다 연기가 이루어지기까지의 수련과 NG 없는 한 번의 시도로 완성되는 연기가 합치되는 과정은 편집과 후반 작업이 끼어드는 '영화'의 과정이라기보다 배우의 온전한 예술일 수 있는 '연극'의 과정에 가깝다. 그만큼 수행자의 위치에 집중하는 이제까지의 '연기 예능'과 조금 다른 차별점을 두기 위해 <할리우드에서 아침을>은 배우들이 새롭게 발을 디딘 미국 할리우드라는 장소에 초점을 맞춘다.  





박정수, 김보연, 박준금의 전례 없는 예능행보에 반가워하기도 전에 1화 첫 장면에서 나오는 건 다름 아닌 오디션장으로 향하고 있는 배우들의 표정이다. 다소 긴장된 분위기로 진지하게 영어 대사를 읊는 배우들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어머니 혹은 시어머니 역할에서 사뭇 빗나가며 그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기대감을 부추긴다. 지체할 것 없이 곧바로 캐스팅 디렉터 앞에선 이들은 바닥에 그려진 라인에 발끝을 맞추어 선다. 그야말로 배우들이 올라선 시험대는 셋이 합쳐 연기 경력 120년 차라는 네임밸류를 뛰어넘은 신인과 초심의 자리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긴장 섞인 한숨을 쉬지만 사실 이것은 판에 박힌 역할과 똑같은 언사의 시나리오에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어 숨통이 트이는 징조로도 보인다. 이어지는 장면에선 박정수와 박준금의 오디션이 이후 공개를 위해 생략되고, 김보연이 자신의 직원을 해고하는 사장 역할의 연기를 한다. 이 대본에서만큼은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거나 맘에 들지 않는 며느리를 구박하는 일 없이 오로지 '사장'이라는 직함에 의한 단호함만이 드러난다. 드라마에서 익히 들었던 목소리가 이제까지 들어본 적 없던 영어로 얘기하며 짓는 노련한 악센트와 표정은 참으로 신선하다. 연기가 거듭날수록 미소가 번지는 건 다름 아닌 백인 여성 캐스팅 디렉터의 얼굴이었다. 





한국의 풍속과 전통부터 현재 한국인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이것들이 타지에서 온 외국인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는가는 한반도에서 꽤나 흥미를 끄는 주제 중 하나다. 안에서 바깥으로 우리 것을 설파하는 양상은 바깥에서 안으로, 해외 K-POP 팬덤의 리액션이 한국 소비자에게 다시 재전유되거나 (주로) 백인의 얼굴을 한 이들이 한국 문화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얹는 영상이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화제를 몰고 온 양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게 한다. 한국인의 해외 진출 혹은 타지에서의 도전이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이국의 국경과 부딪히고 공명하는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연기하는 배우들'이라는 예능 포맷만큼이나 우리에게 익숙하다. 물 건너온 평가에 전전긍긍하는 것의 긍부정을 따지기 이전에 <할리우드에서 아침을> 속 세 중년 배우가 서 있는 위치가 이 예능의 행보를 조금 더 특별하게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며 들이밀어진 수출품이라기에 세 배우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늦깎이로 배운 영어회화는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 데다가 대사 암기와 타지 적응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난관에 부딪혀 힘들고 어렵다는 인터뷰가 줄지어선다. 그럼에도 중도하차 없이 오디션을 보고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수행하며 이제까지 자신의 연기 경력을 설명하는 초심의 자리에 선 그들은 하나같이 미소 짓고 있다. 어쩌면 중년으로 거듭났을 때 찾아오는 역할의 한계, 그것이 더욱 여성일수록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었던 연기의 경계선이 그 자체로 배우 스스로를 짓눌렀던 것이 아닐까. 호의적인 손짓에 떠밀렸다기보다 좁디좁은 이 땅에 그들을 짓누르고 있던 압력에 의해 튕겨져 나간 행보이지 않을까. 집중력이 부족해서 엇나갔던 것이 아니라 다른 길로 샐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예능과 함께 읽어 내려가는 독해는 기존에 미디어에서 덧씌워졌던 '여배우'라는 수식어의 장막을 걷어가며 한 발 더 가까운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다는 위치의 진일보이다.


 



배우의 이름을 건다는 건 그 자신이 지닌 얼굴을 건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능 <할리우드에서 아침을>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이야기를 담은 얼굴이 '여배우'라는 베일을 걷고 여성의 목소리를 낼 때 어쩌면 그 행보가 가장 여자다운 당당함이 아닌 것인가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의도치 않은 도전이 익숙지 않은 배움과 부딪힐 때 순조롭지만은 않으나 이 즐거운 상상을 몇 보 더 뻗칠 수 있게 하는 세 배우의 행보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정말 '예능'으로서, 앞으로도 기대가 큰 나아감이다. 한국서의 한정된 역할만큼이나 미국이라는 타국의 땅이 그들을 이방인으로 서있게 하지만 그러기에 문 밖에서 크게 노크할 수 있는 세 중년의 얼굴이 이번 주 일요일 새롭게 방영될 3회에 대한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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