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본 영화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지 Apr 27. 2019

앉은 자리에서 숨이 가쁠 영화

영화 <배드 지니어스>

*** 본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배드 지니어스>를 보고 있자면 공부를 잘한다는 사람은 결코 공부만 하고 있지 않았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너무 많이 알수록 더 많은 걸 책임지기 때문인 걸까. 한 번 외운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모든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천재소녀 린(추티몬 추엥타로엔수키잉)은 선생님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명문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자신의 집안 형편보다 월등한 규모의 학교 진학에 앞서 이사장에게 장학금을 먼저 요구하는 영화 초반의 시퀀스는 그녀가 그동안 어떤 삶의 노선을 탔었는지 실감하게 한다. 즐비하는 숫자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은 이 사회에서 그가 속한 위치와 협상하고자 하는 상대의 시점, 그리고 협상 대상의 가치를 한 손에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재주로 꼽힌다. 역시나 똑똑한 이사장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린은 학교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꾼 한 사건을 겪게 된다.

 


우수한 성적의 린에게 점차 그녀의 답안을 함께 공유하자는 학생들이 늘어간다. 처음엔 단짝 친구인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를 순수하게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건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돈 많은 집안의 자제들에게 '좋은 성적'이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의 부차적인 단계일 뿐이며, 그들이 다니는 학교 재단 역시 '운영비' 명목의 뒷돈을 받으며 그들의 행실을 눈감아 주고 있었다. 이 모든 생태는 그들이 가진 권력, 기득권이라는 위치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의 질서에 뛰어든 린은 그녀의 답안을 넘기기로 한다. 정당한 댓가를 받고서 말이다. 



<배드 지니어스>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시선을 경유하여 커닝의 과정,그 답안을 몰래 전달하는 스릴을 전달한다. 한칸씩 띄워놓은 책상 사방이 뚫려있고 언제 누구의 시선이 마주칠 지 모르는 시험장에서 전달하는 자와 전달받는 자의 은밀한 소통이 시작된다. 린은 자신이 배운 피아노 코드를 숫자와 일치시킨 뒤 오지선다의 답안을 '피아노 섀도잉' 움직임으로 표현해낸다. 손가락을 따라 눈초리가 휘날리고 음악은 들리는 자에게만 들린다. 집중할수록 커지는 동공과 메마른 꿀꺽거림은 지나친 거슬림으로 다가온다. 정작 주변의 시험을 치르는 학생과 감독을 보고 있는 선생의 이목은 끌지 못하지만 언제라도 들킬 수 있다는 전제는 스스로의 동작을 생각보다 크게 만든다. 나만이 내 행동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경지, 그 외줄타기가 불러일으키는 위태로움. 누군가는 이 숏들의 배치를<배드 지니어스>의 명장면으로 꼽을 것이다. 그리고 보상이 커질 수록 스릴은 배가 된다. 



보수적인 공공기관 중 하나였던 '학교' 안에서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은 자본주의의 물질로 쉽게 환원되었다. 그렇다면, 이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린의 몸부림 역시 부정행위라는 맥락에서 똑같은 이해관계로 치환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앞서 말했듯이 똑똑한 린의 두뇌는 린과 상대의 위치 가장 먼저 파악해왔고, 그런 린은 항상 자신의 낮은 위치를 보수할만한 거래를 청했다. 학교 안에서만 일어났던 부정행위가 점점 불어나는 아이들의 거짓말로 인하여 국제 대학 시험장인 호주로까지 판을 벌린다. 부패한 환경도 아니고, 전교 1등과 집안 내력의 영향력도 고수할 수 없는 외국 시험장의 풍경은 그야말로 시험 그 자체로 린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해온다. 학교 바깥의 부정행위는 더 이상 어린 학생의 치기가 아니라, 린의 위치 자체를 절대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겨버리면 린의 두뇌는 이제부터 전혀 다른 상황들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상대의 위치를 가늠하고 그 반응에 눈치를 보거나 자신의 이득을 계산하는 행위는 사실 모두 갑이 아닌 을의 소유였으므로. 이 판만 무사히 넘긴다면 더 이상 '을'인 린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런 양식들은, 특히나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임을 감안한다면, 도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껏 '지나치게 가깝도록' 이 모든 상황을 포착해온 영화 속에서 도식은 숨이 가쁜 감정으로 치환된지 오래다. 이 배치마저 누군가에게는 하수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틈이 없도록 영화는 치열한 태도를 고수한다. 그렇게 린의 행동과 심리를 따라 흐름을 따라간 관객이라면 역시 결말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아래에 있던 린이 시험을 치르는 도중 피아노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 아래로 '임하는' 순간은 결말부 린의 결연한 표정과 디졸브된다. 결국은 가족이며 정의이고, 선이라는 한계에 부닥칠지라도 린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카메라 시선만큼이나 순간 순간에 코를 박고 집중했던 린의 시간들이다. 군중 바깥 누구도 이 안에 속한 나를 알아봐주지 않지만, 나만은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에 가능한 군중 속의 고독이기도 하다. 부정행위에 대한 증언을 털어놓기로 결정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린의 곁에 남아있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가장 치열한 영화의 결론이기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발을 담근 심연을 바라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