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do it.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클리어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나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매일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생동감 넘치듯이 말이다.
MBTI 가 I 이면서도 파워 E와 같은 성격도 있다. 5:5라고 의심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어렸을 때는 병원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꿈꾸고 편입을 하면서까지 의료인을 꿈꿨다. 의사. 간호사는 되지 못했지만 물리치료사, 즉 의료기사에는 합격했다. 4년제 대학을 2년 만에 졸업하고 국가고시에도 당당히 한 번에 합격했다. 나 자신에게 많이 뿌듯했다. 그때에는 말이다. 취업이 100프로인 학과라서 취업 걱정은 없었다. 다만 내가 원하는 대학병원에 합격하고 싶었지만 그렇지는 못했다. 아쉬움은 있지만 시립병원에서 대학병원 못지않게 많은 임상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학병원의 길이 열리지 않은 건 나랑 맞지 않은 부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재활병원, 시립병원에서 근무를 하면서 분명 보람도 있고 내 환자분들이 점점 회복되는 케이스를 보면 뿌듯함은 말로 표현이 안된다. 그런데 2년 차, 3년 차가 되었을 때 아무래도 신경계 분야에 있다 보니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머릿속으로 가능할 것 같은 치료방법들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벽에 부딪친 것이다.
나의 부족함은 점점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다른 선배님들을 보면서 내가 5년 후에 아니 1년 후에 좋은 선배의 모습으로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물리치료사가 치료가 행복하고 즐거워야 하는데 나는 한없이 우울함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너무 속상했고 내가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현실이 답답했다.
안정적인 취업을 해도 만족감은 오래가지 못한 것이다. 허탈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병원의 일상이 이렇게 한순간에 포기할 수 있을까? 계속적으로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진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수많은 질문 중에서 내가 퇴사를 결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질문이 있었다.
00아, 과연 일 년 후에 행복할 자신 있어?
나는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계획을 하며 살아온 20대 후반에 나는 과감히 퇴사를 했다. 일주일은 후련했다. 긴 휴가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2주일이 접어들면서 항상 일을 해오면 습관이 있었던 파워 J의 사람이 불안해진다. 앞으로 뭐하지?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 막막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공부해 보았던 공무원 시험공부를 해야 할까? 일단은 시도는 해본다. 역시 공무원 시험은 나랑 안 맞다. 공무원의 혜택이 너무 좋고 안정적이라는 큰 메리트가 있지만 나는 공무원 시험이 정말 나랑 안 맞고 국가고시 해부학 공부가 어렵지만 그 공부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과라서 그런 걸까?)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에 친구의 권유로 대학교 교직원에 응시를 하게 되었다. 물론 계약직으로 말이다. 나는 이력이 특이한 게 편입을 하기 위해 영어학과를 입학했고 그리고 물리치료학과를 졸업한 케이스이다. 내 이력이 사무직 응시 조건에 괜찮을까? 싶었다. 그런데 합격했다. 계약직이라서 그런 걸까? 그래도 미리 계획만 해오던 나에게 이 도전은 너무 신기했고 귀하고 감사한 도전이었다.
이 도전을 시작으로 나의 도전에 대한 Learnig 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대학교에서 일을 하다 보니 대학생들을 매일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학교 다니면서 대학원에 진학해볼까? 물리치료학과의 전공을 살리기에는 이제 나는 다른 터닝포인트가 필요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상황에서 지원해 볼 수 있는 학과는 영어교육학과이다.
서울에서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4년제 대학교에서 특이한 나의 이력이 과연 괜찮을까? 아무리 대학원은 웬만하면 합격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자격이 안되면 안 되는 거니까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도전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지원서를 넣었다. 면접도 보았다. 당연히 영어면접도 있었다. 준비한 자료에 대한 질문은 받지도 못하고 뭐라고 말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게 긴장되었던 그 순간의 감정만 기억이 난다. 면접이 다 끝나고 학교를 나서면서
에이,, 안 되겠다.. 안되었겠네... 그래... 안 되는 거였어... 에휴휴...
혼잣말을 몇 번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난 에피소드이다.
그런데 결과는 아주 반전이다. 합격이다. 당당히 합격이다.
그렇게 영어교육과 대학원생으로 입학을 하게 된다. 물론 영어과목을 좋아하고 대학원이라는 기대감이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발표수업 때 교수님께서 칭찬을 해주셨다.
오잉? 내가 발표를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몰랐다.
정말 말 한마디가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말. 나는 전적으로 믿는 편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들이 많이 있지만 뻔할 수도 있었던 결과를 혹시 모를 0.1% 희망으로 문을 두드려서 대학원의 문을 당당히 합격하고
나의 인생의 전환점은 대학원생부터 시작입니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을 하면서 대학원생으로 다니는 시간들이 물론 피곤하고 과제를 해야 하는 부담감과 시험을 잘 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욕심까지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나날들이었지만 2년 5개월이라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지금도 대학원생 때의 추억을 이렇게 쓰면서도 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그만큼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많이 배우고 좋은 동기부여가 되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영어교재 제작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워낙 서점에는 이미 영어교재가 많이 있지만 내가 제작한 영어교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뿌듯할까? 꿈꾸며 교재 편집 분야로 지원서를 응시했다.
현실의 벽은 높았다. 아무리 대학원을 나와도 최종 합격의 문을 열기에는 아직 부족한 실력이었나 보다..
한동안 이력서를 수도 없이 작성하고 지칠 무렵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고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영어유치원 교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그런데 그 도전의 길을 금방 열렸다. 오잉? 나는 영어 어린이집 선생님이 맞는 사람이었을까?.. 1개월.. 2개월.. 쉽지 않았다... 역시 육아는 현실이다.. 미혼인 나에게는 엄청난 벽이었다.
아이들은 너무 예쁘지만 학습을 가르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이직 준비도 동시에 진행을 하면서
영어 어린이집 선생님은 이직에 성공하면서 대략 일 년 정도 하고 내려놓았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함이 있었다.
지금도 문득 그 아이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준비가 부족한 선생님을 만나서 더 미안함이 있었다. 마지막 수업 때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아이들은 이별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미안했다.. 현실이 정말 마음 아팠다. 이직을 준비할 때는 이 시점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많은 감정을 배우고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가들 잘 지내고 있을 거야 그렇지? 선생님은 너희들은 잊지 않을게~)
이직에 성공한 나의 최종직업은 공공기관 사무직이다. 안정적인 면과 복지혜택이 내가 지원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심지어 한동안 이력서 쓰는데 지친 탓에 다시 시작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취업사이트를 검색해보던 중에 마지막 날에 응시하게 된 기관이다. 20대의 마지막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다.
아직은 30대 초반이지만 곧 40대가 되고 50대가 될 텐데 젊은 나이의 도전도 물론 있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흥미가 있는 배움이라면 도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작성하는 기록들이 나의 또 다른 도전이기에 앞으로 기대하며 작성해보려고 한다.
to be co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