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른이란 정의는 무엇일까?
어렸을 때는 30대만 되면 "그래, 진짜 어른이다."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막연하게 고민과 걱정이 존재하지 않을 거야! 외치고 꿈꾸며 30대를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어린아이 같고 인생도 어렵고 인간은 더 어렵다.
브런치 글의 소재가 점점 고갈되고 다른 작가님의 글을 꾸준하게 읽고는 있지만 정작 나의 글은 멈춰있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다가 문득 김혜남 작가님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책을 읽고 있는데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이렇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등장한 시 한 편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용감히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느긋하고 유연하게 살리라.
그리고 더 바보처럼 살리라.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더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더 많은 산을 오르고, 더 많은 강을 헤엄치리라.
아이스크림은 더 많이 그리고 콩은 더 조금 먹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더 많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거리를 상상하지는 않으리라.
-나딘 스테어의 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중에서
내공이 전해진다. 한 번 사는 인생 저렇게 마음먹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멋진 인생일까? 나를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실수에 대한 걱정이 많아서 완벽주의 성격이 강하고 느긋하게 유연하게 살기보다는 바쁘게 살아갈 때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바보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더 많은 지식에 대한 욕심이 있고 매사를 미리 걱정이 많은 편이다. 어쩌면 실제도 더 많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거리를 상상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이 한번 시작되면 끝이 없다.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많은 분들이 이 시에 공감이 많을 거라고 예상해 본다.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해 버리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깝고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이니 걱정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방법은 알지만 행동까지 이르기에 이렇게 어려운 걸까? 가끔은 답답하게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심지어 내 나이가 80세 노인이 되었을 때 인생을 너무 숙제처럼 해치우듯 살았다면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슬럼프가 익숙해지는 순간이 과연 올까?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완벽한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만 슬럼프의 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 무게는 시간이 공평하게 24시간 주어지듯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공평함 아닐까? 싶다. 이 질문에 어떤 이들은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고 있으면 꽃길만 걷던데요?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마다 기준점이 다른 것이지 모두에게 슬럼프가 존재한다는 건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곰곰이 기준점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금방 이해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슬럼프에 대한 방향성을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무게의 주인이 되느냐 VS 끌려서 고생을 하느냐
차이점은 있겠다. 카테고리도 경제적인 것. 학벌. 외모 등 다양하다. 끌려 다니기만 한다면 그건 최악이 되고 익숙함의 무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주인이 되었을 때는 방향성이 확실히 다르다.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불안은 잠시 접어두련다. 초능력자처럼 당장 해결될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천천히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방향은 인내의 열매가 된다. 슬럼프의 주인이고 결국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조차도 이렇게 글을 쓰면서 방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렇게 고난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시련의 시간 속에서 허우적 되는 경우도 있다. 주인이 된다는 건... 어렵다.. 당연하다.. 쉽지 않다.. 이렇게 말처럼 쉬었다면 인간은 고민걱정거리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그 시간 가운데 많이 성장하고 나중에 돌이켜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생을 30년 넘게 살아가면서 제법 모난 부분 없이 평범하게 그리고 공동체에서 튀지 않게 행동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배려와 베푸는 삶이 마음의 안정이 되었고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다른 관점의 생각들이 나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누구를 위한 배려일까?
난 오해를 극도로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성격이라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기가 아주 익숙한 사람 중에 한 명이고 ISFJ는 배려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내가 배려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마음의 상처받았다는 측면도 있을 수 있지만 관점의 충격이 더 크게 온다.
배려는 내가 편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해서 하는 행동인데 배려를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속상한 일이다. 물론 일방적인 배려는 부담스럽다. 그 관점까지도 계산하고 행동한 행동인데도 배려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 그 사람과는 성격이 맞지 않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평가가 무조건적인 답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종종 들어왔던 소리였다면 이렇게 관점의 충격이 오지 않았겠지만 아니었기에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나의 생각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의 진심을 그리고 감사함을 형식적으로 알아주는 사람 말고
추상적으로 해석될지도 모르겠지만
진심은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지금 당장은 답답한 안개자국처럼 뿌옇게 보일지라도
안개가 사라지고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지금 갈팡질팡 떠오르는 생각들도 결국엔 빛나는 추억이 될 거라고 믿는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셀프칭찬 해주시며
오늘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