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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Oct 30. 2019

양상국이 경쟁자가 되었다

양상국과 공유 사이를 떠도는 82년생 남자들

배경

9월 중순경인가 보다. 양상국이 개그콘서트 신규 코너를 선보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런 막강한 경쟁자가 나타났다니. '아무것도 모른다.'며 포효할 때, 손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오글거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한 표정, 관객들은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기 머리는 놔두고 왜?)


9월 초순경이다. B급 감성을 내세운 짧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피식하고 웃음 지을 수 있는 감성시를 쓰는게 목적이었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이야기였기 때문에 하루에도 글감이 넘쳐났다. 구독자가 귀찮지 않을 정도로 올리도록 손가락을 자재시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관건이었다. 아내는 나의 이런 뻐꾸기를 연애시절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식상함을 넘어 '거기서 한마디 더 하면 때린다.'는 협박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도 쓴 시를 보여주면 '피식' 웃었다. 성공이다.


양상국의 신규코너를 본 것은 28일 저녁, 어제다. 그러니 나는 표절하지 않았다. 양상국이나 작가들이 내 글을 보았을 리 만무하니, 우린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심장을 쥐어짜는 오글거림을 참으며 보았다. 그리고 이 막강한 경쟁자를 어찌했든 상대해야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해석

그도 나도 경상도 남자다.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경상도 남자 양상국이기 때문에 이 코너는 힘이 있다. '밥 묻나?', '아~들은?', '고마 자자.' 이 세 마디면 하루의 대화가 끝나는 경상도 남자가 아닌가. 옛말의 성조가 남아있는 경상도 사투리는 여자가 말할 때는 왠지 애교스러울지 몰라도, 남자는 투박함과 촌스러움 그 자체다. 양상국은 결혼하면 아들을 낳을 것인지 딸을 낳을 것인지 묻는 여친에게 경상도 억양에 어색한 표준어로 ‘나한테 애기는 너하나로 충분하다’라는 심쿵멘트를 날린다. 그래서 내겐 양상국의 외침이 "경상도 남자들이여, 변해야 한다!"라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경상도 남자조차 이렇게 변했는데, 대한민국의 남자들 뭐하고 있느냐고 계몽하는 외침 말이다.


배경2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다. 소설만큼 인지는 모르지만, 영화 개봉을 시작으로 평점 테러와 젠더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고, 무덤덤해질 정도로 자주 보고 있는 현실이다. 논평 중에는 이야기의 구성상 한 여자에게 많은 사건이 몰려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가족 구성원에서도, 대학 전공의 특성상 늘 여자가 많은 환경에서 살아온 내 눈에는 여전히 많은 여성이 김지영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안다. 본다.

출근길에 J일보 스포츠 란에 <82년생 김지영과 92년생 김지영은 다르다> 제목을 언뜻 보고, 시계를 보고 잠시 고민하다 그냥 집을 나섰다. 결국 사무실에 도착해 다시 찾아 읽었다. 굳이 저렇게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나? 눈길 한 번 더 주겠지만, 그게 배구 선수 한 사람과 여성의 삶을 대비시키는 건 좀 억지스럽지 않나 싶었다. 어찌했건 요즘 김지영과 연관된 검색어가 꽤나 올라오고 있다. 미디어의 습성이다. 어? 그러고 보니 이 글도 마찬가지로 보이겠네. 미안 앞에 말 취소.


해석2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선 안된다'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여성의 입장'을 말할 '입장'이 아니다. 어설피 말하는 것 자체가 김지영의 마음을 더 답답하게 하는 일이니까. 대신 82년 생 김지영과 함께 살아가는 남자들, 그중에 한 명의 시선으로 '남자'를 이야기하려 한다. 누군가는 거부하고 있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반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이제서야 남성 중심적 사회에 살아왔음을 인정하고, 그 '익숙했던 기득권'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 힘 쓰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애쓰는 남자 공유, 대다수의 남자의 모습이다. 워워~ 외모는 빼고.

나도 여전히 갈팡질팡 중이다. 명절날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기 위해 나는 분투한다. 설거지와 제사음식 만들기, 아이들과 놀기, 뒷정리 등 내가 아는 모든 스킬을 동원한다. '고생 많았어, 고마워'라는 멘트는 화룡점정. 원래 직업이 연출가 아닌가, 평점에 예민하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매겨주신 평점은 별 반 개, 매번 흥행 실패다. 결국 이 지점에서는 남자가 바뀌어야 하는 점도 있지만, 여성 안에서, 세대 안에서 변화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생긴 공유도 그 선에서 멈춘다. 자신이 잘 하면 지영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젠더 문제에서 일반적인 남자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내가 공유처럼 생기면 당장 나아질 수 있겠다. 아쉽게도 우리 아부지가 날 그리 낳지 않았다. 거의 확정적으로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거다. '우리'는 공유보다 상당히 불리하다. 아마 '우리'가 공유같이 잘 생기고 기럭지도 길었다면 아내의 얼굴은 좀 더 웃음꽃이 폈을거다. 뭐, 이건 안된다. 절대.


정리

남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직장, 가정, 학교에서 각기 논쟁의 좌표가 다를 거다. 남자에게도 '이렇게 해야 해'라는 표준 행동 매뉴얼이 마련되어있지 않다. 케바케다. 양상국은 그 지점에서 꽤 멋진 코너를 만든거다.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문제에서 적어도 한 남자로서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 지점에 대해 케이스스터디를 해주고 있다. 다른 지점에서의 젠더 문제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해해선 안되는 부분이다.


어찌 들으면 양상국의 멘트는 여성을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하는 존재로만 대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시선은 불편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외침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다. 잘 들어보라. 이 코너의 핵심은 사랑해야지가 아니라, '알아야 해'라고 외치는 말이다. 사실 그 다음 말은 웃기고자 하는 말이다. 서로의 머리를 쥐어 뜯으라고 하는 말이다. 양상국은 알기 위해 노력하자. 82년생 김지영을 보자. 읽자. 아내와 여자친구(이게 동시에 있으며 안된다)의 말에 귀기울이자. 부디 세 마디 말로 하루를 끝내지 말자라고 외치고 있다고 해석한다.


피식 웃음을 던져주는 정도의 감성시를 써왔는데, 내 글을 보며 양상국을 떠올릴까봐 걱정된다. 감성이 코믹으로 변하는 순간, 시가 아니라 꽁트가 되어버린다. 에이, 양상국이 진짜~

양상국은 나를 모르겠지만, 조언을 붙인다면 개그가 식상해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 매주 일요일 밤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소리치겠지만, 재야에는 '언제쯤 너를 알게 될까'라며 고민하는 남자들이 꽤 많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자기, 자꾸 내 이야기 쓰지마, 부끄럽게 왜그래'

- 내가 말하고 싶은 여자는 한 명 밖에 없어


어젯밤 내가 날린 멘트다. 초야에는 이런 생존 뻐꾸기가 일상이 된 생활 고수들이 즐비하다.

‘양상국이, 니 긴장해라이~’


경쟁자 얼굴이다, 어찌보니 꽤 잘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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