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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Oct 29. 2019

평론이 그런거야?

B급 해석, 머리글

꽤나 유명하고 권위 있는 평론가의 글을 읽었다. 한 장, 한 챕터, 책의 반을 읽었을 때쯤, 단정 지었다. 감히 나는 그의 지성을 따라갈 수 없구나. 누군가 노크를 하는 소리만 들어도 앞서 읽었던 내용이 날아갈 것 같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읽어 나가던 중에, 문득 복창 밑에서 끓어오르는 반감이 소리쳤다. 이게 문화평론이라고? 그 문화는 도대체 누구의 문화라는 거야? 대중의 지식수준을 이 정도로 높게 보았다면 나는 이 양반이 말하는 '대중' 축에 끼지 못하겠구나, 이내 풀이 죽었다. 격한 한숨을 쉬었다. 아! 내 수준은 B급인가.


내 후배이자 친구인 철학소년에게 물었더니 '비평에는 비평 그 자체가 문학으로, 작품으로서 다루어지는 분야가 있고, 말 그대로 대중을 위한 비평 분야가 있다.'라고 한다. 작은따옴표로 인용한 이유는 그런 분류 자체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속으로 그랬다. '잘났군, 그들만의 리그라니.' 이 삐딱한 마음은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가 보지 못한 나의 열등감일 수도 있다. 자, 까짓것, 열등감이 있으라지 뭐. 난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글은 쓰지 않을 테다, 두 손 모아 불끈 쥐고 다짐한다.


그 책은 책장에 잘 꽂혀있다. 나도 왜 내가 그러는지 모르지만, 가끔 꺼내 본다. 문체의 화려함과 난해함을 느끼고 싶어서 그런가? 집 앞에 서서 건물의 색과 담쟁이덩굴과 벽돌 소재와 주변에 날아다니는 새의 종류와 오늘의 날씨까지 모두 한 소리씩하고 나서야 문을 열고 들어가는 프랑스 철학자로 빙의된 평론가의 글을 읽고 싶을 때, 그 책을 꺼내본다. 역시 한 장 읽고 다시 꽂아둔다. 읽을 사람만 읽을 테지. 속으로 구시렁 거린다.


나는 정덕현 칼럼니스트를 좋아한다. 그의 글이 딱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코드도 나와 비슷하다. 그의 글을 읽으면 '해석의 동질감' 때문에 단 한 번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무척 반갑다. 정덕현이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다. 글을 읽고 나서 마지막에 쓰인 이름을 확인할 때가 더 많다. '역시 정덕현이었군. 좋은 글이야!'


나는 듀나의 글을 싫어한다. 97.6%는 피딱하기 때문이다. (수치는 그냥 느낌의 표현일 뿐이니 트집 잡지 말귀~) 그래도 듀나의 글은 시선의 차이를 느끼게 해준다. 옆통수, 뒤통수를 때려주는 맛이 있다. 싫어하지만 읽게 된다. 그의 글투가 싫을 것일 뿐 생각이 싫은 건 아닌가 보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이 좋다. 읽기 쉬워서 좋고, 일상적이어서 좋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좋다.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의 표현이 나의 눈높이와 얼추 비슷하기 때문이다. 너무 고고하게 높은데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는, 그 얼추 비슷한 시선이 나는 좋다.  


A급 리그가 분명 있으니, 불만 갖지 말고 A급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나는 B급이 좋으니, B급 해석의 B급 평론을 쓰려 한다. 다시 한번 다짐한다. 중학교 2학년생이 알아듣지 못하는 글은 쓰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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