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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Nov 05. 2019

김지영

알지 못하면 듣기라도 해야지

70년 대에 태어나 아버지와 아이들의 시간을 모두 겪고 있다. 변화된 것과 흔적이 남은 것과 습관이 되어 여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모두 보고 있다. 그러니 82년생 김지영을 삐딱하게 보는 생각들이 답답하다. 과거에 얽매인 사람과 대화도 힘들지만, 현재에 서서 미래만 보는 사람의 입장도 답답하긴 매 한가지다. 보려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대화를 하기엔 시간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72년생 김지영과 82년생 김지영과 92년생 김지영은 다르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녀가 여전히 김지영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김지영이었다. 김지영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김지영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전생에 김지영이었을지는 모르나,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내게도 한계가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듣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인식의 방향이 틀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건 아마도 인간에 대한 인식문제인가 보다. 내가 되어보지 못한 존재에 대해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결국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인가 보다.


이현경 아나운서의 글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그녀가 말했다.

"여전히 김지영이라면 92년생 김지영이고 싶다."고, 그리고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웃는 김지영이 많았으면 좋겠다. 경험적으로 김지영이 웃을 때, 공유가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경험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줘야 할지 어렵다. '맞아 그렇지.'라고 무언의 공감대를 가진 이들도 있지만, 또 몇몇은 '뭘 알아? 네가 내 입장이 되어봤어?'라며 화내거나 울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듣고 보아야 하는 일이 남았다. 그러다보면 인식의 방향이 틀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화내던 그도, 울던 그도, 듣던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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