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Eu zen에우젠'은 '행복하게 산다'는 의미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요즘 말로 웰빙, 웰라이프 정도? 내 이메일 계정이 wellbeingwelldie인데, 한 번은 외쿡친구에게 메일을 알려주었더니, 크게 웃었다. 뜨끔, 문법에 맞지 않나? 콩글리쉬인가? 찰나의 순간 갖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니까. 훗!
'좋은 의뮈에요. 잘 솨는거 종말 즁요합니돠.' 오, 그래? 의미는 통한다 이거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전,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유명한 이야기일텐데, 그때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뭐라고 했길래, '아! 니가 그카머는 내는 더 이상 설득할 자신엄따. 니 맘대로 해라.' 했을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중요한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며, 더욱이 이는
올바르고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
-플라톤, <크리톤>-
역시 테스형은 달라! 죽음을 코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니 '철학자'라고 하는 거지. 2020년 추석,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훈아 씨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테스 형에게 물어봤더니, "테스형도 모른다꼬 카데에"라고 했다. 정말 소크라테스가 모른다고 했을까요? 떠들석한 화재몰이 뒤에 나훈아 씨의 사촌동생 나진기 씨는 본래 그 노래는 큰아버지 산소에서 영감을 얻었고, 큰아버지를 기리는 노래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테스 형은 사실 나훈아 씨의 아버지의 애칭이었나 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던 질문,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었던 대답이다. "아들아, 아부지도 잘 모르겠다."라고 했나 보다. 사내들은 이 대화의 뉘앙스를 가슴으로 공감할 것 같다. 아들이 이 질문을 했을 때, 아버지로서 받는 느낌, 알죠? '아들아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니 스스로 알아야 하는기다.' 흑, 아부지!
오기노 히로유키는 테스 형의 유언 같은 가르침을 이렇게 해석했다.
"잘 산다는 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며,
그 기본 좌표는 요즘 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픽테토스의 인생수업] 서문-
만약 그대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잘 사는 것'이란 말에, '그래서 뭐?'라 하신다면 나는 부랄친구를 만난 기분일 것 같다. 보통 부랄친구는 이런 말로 응수했다. ‘야! 시끄럽고, 잔 비었다. 짜슥아'
'잘 사는 것'은 '올바르게 살아내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목에 칼이 들어온 순간 윤리나 도덕 따위는 뒷주머니에 넣어버리는 예는 영화, 드라마, 역사책, 윤리도덕 시간에 숱하게 회자된다. 윤리 시간에 잠만 잔 사람 손! 사실 드라마는 이런 갈등구조가 있어야 재미도 있고 공감도 가지,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는 넘 비현실적 캐릭터다. 아닌..가? 여튼 테스 형의 마지막 가르침은 윤리와 도덕이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잘 살아내기 위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라는 것이다.
'우리 삶에 목적이 있다'는 주제는 '우주에도 변화 목적'이 있다는 대전제에 귀속된다. 이건 정말 중요하다. 헌데 이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인과의 법칙만으로 보는 기계론적 우주관을 갖고 있다면 이 '목적이 있는 우주'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경희대 한의학과 총장을 지내셨던 한동석 선생님은 그의 저서 [우주변화원리]에서 우주의 목적을 '공도의 목적'이라고 표현했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듯해 보이지만 우주의 변화에는 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인간의 물욕이나 명예욕, 애욕 같은 사적인 목적성이 아니라, 우주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도의 목적’이라고 표현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은 지구가 지축이 기울어진 채로 태양을 안고 돌아가는 기계적인 운동의 결과이긴 하지만, 이 사계절의 순환 가운데에서 인간과 만물이 살아가는 모든 생명현상의 일어난다. 우주에는 음양오행이란 절대적의 변화 법칙이 있고, 이 큰 틀 안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 역사가 펼쳐진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란 우주의 공의의 목적과 합일하는 삶이어야 한다. 다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매 순간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공도의 목적과 하나 된 존재로 사느냐, 사적 욕망에 따라 살아가느냐! 올바르게 사느냐, 제 맘대로 사느냐, 열매가 되느냐, 낙엽이 되느냐. 비유하면 개미로 살 거냐, 베짱이로 살 거냐 하는 건데. 문제는 우리는 대개 ‘베짱이로 살고 싶지만 겨울은 따뜻하게 보내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거다. 어! 이거 괜찮은 제목 같은데?
이제 '잘 사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다.'라는 말에 중량을 확 올려보자. 거기에 힘 꽉 주고, 네 맞아요. 생각하시는 거기. 이얍! 사람의 인생이란 우주의 거대한 변화 주기에서 보면 하루살이 아닌가. 영국 우주국의 천재 과학자 루이스 다트넬은 [오리진]에서 지구 기후와 지각에 큰 영향을 주는 우주의 반복적인 주기가 있는데 약 12~13만 년의 주기라고 했다. 밀란코비치 주기라고 하는 이 주기에 따라 우주는 빙기와 간빙기를 반복한다. 즉 우주에도 큰 봄, 큰 여름, 큰 가을, 큰 겨울이 있다는 거다. 겨울은 빙고! 빙하기다. 약 12만 년 전에 이산화탄소의 양과 기온이 가장 높았던 변곡점이라고 하니, 지금은 우주의 여름 끝자락, 가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루이스 다트넬은 이 우주의 주기적 변화가 지구의 환경을 바꾸었고 인간의 역사, 정치, 사회, 탄생과 진화까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빅 히스토리에 비해 인간의 생로병사 주기는 겨우 7~80살 정도, 그러니 이렇게 살거나, 저렇게 살거나, 좀 비겁하고 좀 속이기도 하고, 남 울리기도 하고, 가끔 나쁜 짓도 하면서 살면 뭐 어때 할 수도 있다.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 나도 그 놈들처럼 누릴 거 다 누리고, 즐길 거 다 즐기면서 살아도 되지 않냐고? 하마터면 착하게 살 뻔했다고! 맞다. 단! 우주에 목적이 있고, 인생에 목적이 있다면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현실적이지 않게 들리던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쌓아라. 세속적 욕망보다는 진리를 찾는 삶을 살아라’라는 가르침이 정확한, 진실한 가르침이다.
성리학에서는 사리사욕과 공도의 목적을 인심과 도심으로 설명한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천지와 하나이나, 불교에선 이것을 불성 혹은 본래 자성이라고 한다 -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 타고난 기질과 환경의 영향에 따라 성미가 급한 사람, 느린 사람 냉정한 사람 정이 많은 사람 등 가지각색의 성격을 가진다. 본성이 각자의 오장육부 기질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마음이다. 주자는 중용장구서에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다고 설명한다. 위태로운 마음을 마치 망아지에게 코뚜레를 끼워 날뛰지 않도록 통제하고, 미약한 본성, 도심을 온전히 구현해 내는 삶을 사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고, 수양의 이유이다.
전생과 윤회가 불교의 교리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겠지만, 그렇지 않다. 본래 한민족의 생사관이 불교와 습합된 것이다. 인간이 영혼과 육신이 하나인 존재이지만, 이 몸뚱아리는 내 영혼을 완성하기에 배터리 시간이 짧다. 그러니 윤회라는 장치를 통해 우주의 역사와 더불어 성장해 간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아니다. 윤회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다. 농사는 봄여름 동안 짓는 것이다. 벌레가 먹고 병든 사과는 떨어지고, 잘 영근 사과만 수확한다. 수확이 끝나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유불선 기독교, 이슬람 거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는 공통적으로 마지막 수확의 시간을 경고했다. 그때에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아라.’라고-. 종교가 다르고 문화적 배경도 다르지만, 모든 성자의 가르침에 있는 공통점이다. 인생의 황금률이다.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등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을 찾으려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라 규정하고 철학의 주제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로 가져왔다. 아쉽다. 우주의 법칙을 깨닫기에는 그리스의 환경조건이 적합하지 않았던 이유일까? 다만 우리가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삶의 대하는 태도인 것 같다.
나훈아 씨, 그러고보니 테스형은 비록 우주의 법칙과 삶의 목적에 대해선 답해주진 못했지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선 이야기 해주었네요. 위대한 철학자답게 자신이 말한 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것만은 사실이었어요.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던 것만 보더라도요.
'올바르고 훌륭하게 산다.' 너무 단순해서 우리가 시시해하는 건 아닌지 생각본다. 아니면 반대로 그렇게 살기엔 용기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너무 짧은 이 한생애만 생각하다 보니 우주의 역사와 더불어 성숙해 나가는 나의 존재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