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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정돈된 마음

by 오후의 책방

집근처 어느 학원 건물의 경비실 사진입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왠지 남의 맘 속을 몰래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들어 조심히 주위를 살펴보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사진이 작아 잘 보이시지 않겠지만, 연필꽂이에도 색연필과 볼펜, 연필이 따로 구분해 정리돼있어요. 책상위 메모지도 가지런하게 정돈 되어있어요. 매일 아침 들리는 곳이라 줄곳 지켜봤지만 항상 흐트러짐없이 정돈이 잘되어있습니다.


출근해서 제 책상과 비교해보니 참 가관입니다. 지난 대본과 녹화자료가 뒤죽박죽, 당장 무엇을 찾으려면 전부를 다 끄집어내 한바탕 소란을 부려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다른 자료와 뒤섞여 영영 찾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아시죠? 꼭 이럴 땐 찾지 못하다가 나중에 엉뚱한 때에 불쑥 나오는 거.

정리되지 않은 나의 책상만큼이나 나의 마음도 엉클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우왕좌왕 하며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일과를 관리하려고 수첩에 기록도 하고, 정리법에 관한 책도 여러권 읽으며 고개가 끊어질 듯 "맞아, 맞아" 동감을 하면서도, 몇일 지나면 다시 원상복귀입니다. 만약 이 분이 지금 저의 일을 한다면 일을 더 꼼꼼하게, 완벽하게 해내겠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가지만 보더라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단 말이 있잖아요. 경비실은 다른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곳도 아니고, 많은 업무를 보는 곳도 아닙니다. 그러니 의도적이라기 보다 이 분의 심성에서 배어나온 오랜 습관인 것 같습니다.


얼마전 "정리"에 관한 기사를 봤습니다.

정리를 잘 하면 일의 효율도 높고, 환기도 된다고 합니다. 주기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책상뿐만 아니라 컴퓨터 자료, 바탕화면도 정리하라고 하더군요. 댓글을 보니 정리의 달인이 되고픈 분들이 엄청 많아 놀랐습니다. 모두 같은 마음인가 봅니다.


Naver 국어사전에서 "정리"를 찾아보니-

1.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

2.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종합함

3. 문제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을 줄이거나 없애서 말끔하게 바로 잡음

4.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지 아니하고 끝냄

5. 은행과의 거래내역을 통장에 기록으로 나타냄

6. 불순한 목적을 가졌거나 대오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자들을 골라내어 대열을 깨끗이 함.


혹시 윗글에서 정리법칙 핵심을 모두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받은 건 저뿐인가요? 국어사전의 정의가 정리의 모든 것을 '정리'해 준 것 같습니다.

-질서 / 분류 / 종합 / 문제 제거 / 관계정리 / 기록 / 재조직-


작고하신 은사님과 있었던 일화인데요. 교수님은 제게 인생의 멘토이자 어머니 같은 분이셨습니다. 대학원에 간 이유 중 하나는 학위보다 사실 더 오랫동안 교수님을 모시며 인생의 길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지인에게 선물을 받으셨는데, 그 포장이 꽤나 튼튼해서 따로 빼두려고 했습니다. 언젠간 쓸 일이 있을거라고요. 교수님은 그런 저를 유심히 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버려요. 이선생, 버릴 건 버릴 줄 알아야 해."


교수님은 책상위에 삼단짜리 서류함을 갖고 계셨어요. 거기엔 "처리할 일/ 중요한 일/ 처리한 일" 이란 라벨이 붙어 있었습니다. "처리한 일"은 정기적으로 버리셨는데, 제가 휴지통을 비우기 전에 혹시나 중요한 메모가 빠지지 않았나 살펴보고 말씀 드리면 한번 실수 없이 버릴 것과 보관할 것이 정확하셨습니다.

책상엔 달력을 하나 두셨는데, 바닥에 두고 메모를 많이 할 수 있게 된 달력이었습니다. 매일 하루일과가 끝나시면 붉은 펜으로 사선을 그으셨습니다.

교수님의 습관 중에 하나는 퇴근 전에 꼭 책상위를 정리하시는 일이었어요. 연구실에 있던 저와 후배도 다음날 확인하셔야 할 서류와 논문을 중요도 순으로 책상위에 구획을 정해서 분류해 두었습니다. 정리정돈의 달인 교수님의 모시면서 저절로 습관이 된 것입니다.

지금 사회의 일상화두가 된 "통섭"을 20여년 전에 이미 몸소 실천하고 계셨던 교수님은 학제간 실험연구(언어치료_신경심리_음성학/음성공학_의학 등)에 참여하고 계셨습니다. 강의와 연구는 당연하고 국제세미나를 주최하시고, 심지어 대학행정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그 많은 업무를 어떻게 완벽하게 처리하실까 궁금했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정리와 집중" 이었던 같습니다.


괜히 감상적인 것 같지만, 오늘은 글을 쓰고 나니 무척이나 교수님이 뵙고 싶습니다. 정리되지 못한 엉클어진 마음을 교수님께 털어놓고 꾸지람을 듣고 싶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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