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언어사전
며칠 전, 뇌과학자 장동선 선생님을 인터뷰했어요.
<10월의하늘>이란 행사가 있습니다. 올해로 16년째, 매년 10월의 마지막주 토요일에 100명의 과학자가 전국 50개 작은 도서관에서 강연기부를 하는 행사예요.
장동선 선생님은 최근 2년 정도는 바쁜 일정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셨지만, 이전엔 줄곧 강연기부를 해주신 분이셨죠. 준비위원인 저는 그동안 참여해 주신 과학자들의 인터뷰를 제작하기로 했어요. 17년 차 방송PD로서 촬영과 편집은 제겐 일상일 뿐 어려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10월의하늘>의 전 과정은 모든 사람들이 보상 없이 재능기부를 하는 행사이기에, 저 또한 시간과 사비를 들여 재능기부를 하는 것이랍니다. 이날 촬영장소인 [최인아 책방]의 대표님께서 그 취지에 공감해 주셔서 기꺼이 무료로 장소를 빌려주셨어요.
세상의 모든 시간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진 않겠죠.
나의 한 시간과 장동선 선생님의 한 시간은 밀도가 다르리라 짐작했어요. 그에겐 이 잠깐의 인터뷰도 시간을 쪼개어야 낼 수 있는 시간이었거든요.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보답으로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어요. 매니저님께 사전에 선생님의 일정을 여쭤보았는데, 바로 이어 또 다른 일정이 있다고 했어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바삐 가시는 뒷모습을 보곤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쉽지만, 촬영을 도와준 디자이너님과 둘이 식사를 하게 되었어요. 소소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그녀가 물었어요.
'그럼 PD님은 어떨 때 가장 힘들어요?'
"내가 보기엔 충분히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불만에 가득 차서 해결해 주길 요구할 때요."
요즘 팀을 이끌거나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겼어요. PD라는 직군이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전 십수 년을 거의 1인 1팀으로 일해왔어요. 일거리가 생기면 카메라, 기술, 그래픽 담당이 정해지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흩어지는 식이었죠. 누군가에겐 경력에 따라 지위와 권한, 그리고 책임이 자연히 따라오는 순리일진 몰라도 제겐 그 모든 것이 무척 낯선 일이었어요.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도, 리더로서 해야 하는 순간이 싫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어요.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싫었어요.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게 대신 말해달라고 요구하더군요."
인터뷰를 한 날은 추석명절이 시작되는 날이었어요. 서울에 올라가는 기차표는 어떻게 겨우 구했지만, 내려오는 기차표가 문제였어요. 겨우겨우 구한 표가 밤 11시 28분 차였어요. 식사를 마친 시간이 4시 반, 하염없이 기다릴 수가 없어 서울역에 도착하자 마자 기차에 무작정 올라탔어요. 안내방송에는 무임승차나 재시간이 아닌 승객은 1배의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하더군요. 잠시 뒤 승무원이 입석승객 표를 확인하러 왔어요. 안내방송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거죠. 전 최대한 나긋이 '당연히 과금을 내겠다'라고 말했어요. 그녀는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어요.
‘워워,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제가 쫓겨나지 않으려고 무작정 올라탄 거예요. 아내가 늦게 들어오는 걸 무척 싫어하거든요. 차라리 과금이 제겐 고마운 일이랍니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눈빛으로 보냈지요. 기차시간을 어긴 건 저의 선택이었건만 난처해하는 사람은 승무원이었어요.
왜 그런 걸까요?
그녀도 싫은 소리를 대신해야 하는 사람이었나 봐요.
“결재했습니다”
표정과 달리 과태료는 시원하게 긁으셨어요. 그걸 좀 망설이시지…
조율調律이란,
음악에서 '조율'은 악기의 음을 표준에 맞추는 '튜닝'을 의미해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를 시작하기 전, 악장의 지시에 따라 오보에의 '라 A'음에 맞춥니다.
세상살이에선 서로 다른 의견을 적절히 조절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죠. 아귀가 맞지 않는 사람 사이나 일을 서로 알맞도록 깎아내고 다듬어 조정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해요.
조調는 조화造化를 의미해요. 한영애 님이 노래한 '조율'은 가사가 시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어요. 홀로 아리랑을 작사작곡한 한돌 님 쓴 가사라고 해요. 한국인의 정서가 가득 담긴 노래죠.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는 용서로, 고립은 위로로, 충동이 인내로,....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
하늘님! 예로부터 한국인은 우주만유를 다스리는 조화옹을 하늘님, 하느님이라 불렀어요. 저 하늘처럼 높고 만물을 품에 안은 지극히 높은 분이란 뜻이었죠. 국가제의에서는 다스릴 '제帝'자를 써서 '상제上帝', '호천상제昊天上帝'라고도 했어요. 민가에서는 애칭으로 칠성님, 삼신님이라고 불렀어요.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이 이처럼 다양했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을 인간사와는 멀리 떨어진 분이 아니라, 늘 귀기울여 듣고 관여하고 참여하는 분으로 인식했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우주만유와 인간만사를 다스리는 법도를 '조화造化'라고 했어요.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 강권強權과 인위人爲가 없어도 어긋남이 없는 조율! 이것이 조화의 의미예요.
대화에 덜그럭 거림이 많을 때, 불필요한 오해가 쌓여갈 때, 분열과 혐오가 극심해질 때, 사람 사이에도 조화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해질 때가 있어요. 하느님, 잠에서 깨어나 조율 한 번 해주세요라는 기도처럼요.
장동선 선생님의 인터뷰 약속을 정할 때, 여러 차례 일정을 확인하고 조율해 주신 매니저님이 계셨어요. 선생님의 일정을 제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빈틈이 거의 없는 눈치였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매니저의 역할이 정말 크게 느껴졌어요. 관계를 매개한다는 것은, 그 사이에 당기고 미는 힘을 조율하고 끊어지지 않게 해주는 역할이니까요.
혼자서 일해 온 제겐 가장 어려운 일!
눈에 띄게 빛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계를 잇고 윤택하게 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터뷰 장소를 조율해 주신 <최인아 책방> 매니저님,
저의 뒤에서 카메라 앵글과 노출을 조정하고 스틸컷을 촬영해 준 디자이너님...
기꺼이 내 재능을 기부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이 일도 '조정'과 '조율'을 해준 분들 덕에 해낼 수 있었어요. 대신 난처해주고, 대신 싫은 소리를 해주신 분들 덕분이에요.
돌아와 촬영본을 확인하고 스틸 컷 몇 장을 골라보았어요. 여러 컷이 있었지만, 멀찍이 떨어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진을 골랐어요. 촬영을 도와준 디자이너님이 찍은 컷이었죠. 만약 현장에 매니저님이 있었다면 그의 시선도 분명 이러했을 것 같았어요.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어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오늘 인터뷰 잘 마쳤습니다."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수 있는 건, 싫은 소리를 감내하며 조율하고 조정해 준 그대‘들’ 덕분입니다.
혹시 말이죠. 세상 모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도 조화의 손길이 있지 않을까요. 단지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일 뿐! 하늘님이 잠드실리는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