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천자의 나라, 동이東夷

안중근에서 시작해 배달민족까지-

by 오후의 책방

대한인大韓人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올해는 그의 순국 111주년이 되는 해다. 매년 3월 26일, 기념식과 더불어 사회 각계에서 그의 거사를 되새긴다. 그가 쓴 미완의 논설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역사문제, 북한 핵문제 등 언제 칼을 빼어들지 모르는 위태로운 동북아의 새로운 평화론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네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민족'이란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떤 감정을 가지는가? 세계화의 흐름에서 민족주의에 갇혀서 안된다는 의견과 오히려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세계화 풍랑에서 좌초되고 말 것이란 의견이 맞선다. 심지어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견해까지 있다. 이것은 학자들만의 의미론적 논쟁이 아니다. '민족'이란 어휘가 가지는 온도는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 어떤 집단의식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


"민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충성은 다른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다."

놀랍게도 이 연설의 주인공은 세계 2차 대전은 일으킨 히틀러다. 결국 이 말은 허위 광고에 불과했다. 세계 1차 2차 대전을 치른 유럽에서 '민족'은 곧 분열주의나 국수주의로 해석된다. 소수 민족의 독립을 가장 두려워하는 중국은 민족이란 말만 들으면 화들짝 놀란다. 티베트 위구르족 탄압이나 동북공정 같은 역사왜곡은 '각 민족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우려는 목적이 있다. 더구나 그 이면에는 영토, 천연자원, 지정학적인 이해가 걸려있다.

반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은 자주의식과 타민족에 대한 톨레랑스(존중, 배려)의 균형을 이룬 평화의 개념이었다. 압제자였던 독일과는 정반대로 가장 억압받았던 때에 평화와 공존을 말했다. 그들의 품격을 당신은 공감할 수 있는가? 캄캄한 어둠에도 만약 당신의 가슴에, '미래의 빛’을 품고 있다면 당신 또한 분명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미래는 현재의 선택이 만들어가고, 현재의 선택은 과거에서부터 쌓아 올려진 자아상에서 비롯된다. 독립운동가들이 심장에 세겨져 있던 '대한인'의 자아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간이 꽤 흘렀으니, 10년 전 초고를 쓸 당시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을 테러리스트로 치부한다거나, 안중근 의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아는 학생이 드물었다'는 뉴스(KBS 2010.3.24)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당시엔 꽤나 회자된 기사였는데. 지금 아이들은 다를까? 글쎄, 뚜껑을 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의식은 너무도 심각한 수준이다. 자, '국사교육'이란 키워드로 검색해보자. 선택이냐, 필수냐는 꽤나 오래전 기사부터 눈에 띌 것이다. 내 나라의 역사교육을 필수냐, 선택이냐 논쟁한다는 게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낳고 성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같은 현실에서 ‘한韓민족의 정체성’은 이제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여정은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조선의 건국 시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자신을 부정하려던 사람과 자신을 지키려던 역사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혼란은 그때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안중근 의사 부분도 / 독립기념관 & 한국얼굴연구소


변계량의 상소문

태종우太宗雨라는 말이 있다. 음력 5월 초 열흘에 내리는 비를 말하는데, 농촌에서는 태종우가 오면 그 해에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내 마땅히 옥황상제님께 빌어 한바탕 비가 오게 하여 우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리라”라고 했다. 마침 태종이 죽자마자 하늘은 한바탕 비를 퍼부었고, 태종의 기일이 되면 비가 내렸으므로 이를 태종우라 했다. 『연려실기술』


조선 태종은 일종의 ‘찬탈 행위’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늘 정통성 문제로 고민했다. 따라서 가뭄이 심하든가 홍수로 백성들이 크게 피해를 보면 자신의 부덕한 행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를 고민했다. 세종에게 전위할 때에도 가뭄을 중요한 이유로 들며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기우제에 관한 실록 기사 중에서 중요한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초 관학파 유학자 변계량卞季良은 대제학과 예조판서로 있으며 외교문서를 도맡다시피 한 문장가였다. 그런 그가 태종 16년 기우제를 지내는 문제로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린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 3811)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종 31권 16년 6월 1일)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통치기간 내내 사대주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변계량이 이 같은 상소를 올린 이유는, 임금과 유자儒者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다며 천제天祭의례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태종 31년 실록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자. 천자天子란 천제지자天帝之子의 줄임말로 '하늘의 상제을 대행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을 의미한다.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단군이 곧 천제지자란 의미이다. 뒤에 오는 '천자'는 당시 명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니, 천자국의 주도권이 중원으로 넘어간 시기라는 뜻이 되겠다. 변계량의 말을 각색하면 '원래 우리 단군 임금님께서 천제지자이시고, 대대로 우리가 천자의 나라이지, 명나라에서 간섭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임금께서는 천제를 올리시는 것이 마땅합니다.'가 되겠다.


임금이, “내가 일찍이 들으니, ‘천자天子는 천지에 제사하고 제후는 경내 산천에 제사한다.’ 하니, 나는 다만 이 예만 알기 때문에 경내 산천에 제사하고 하늘에 제사하는 예는 감히 바라지 못한 것이다.” (태종 34권, 17년)


이 말을 정황상 각색하면, "이 사람아, 그랬다가 명나라가 가만히 있겠나? 조선을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분쟁이 생겨서는 안 된다. 우선 천제를 올리는 예법까진 할 수 없고, 산천에 제를 올리는 형식만 취하자" 쯤이 될 것 같다.


변계량이나 양성지 같은 인물들은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제천을 주장했다. 그 근거로 ‘우리 동방은 단군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웠지,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다. 또한 단군 이래 하늘에 천제를 지내온 것이 끊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변계량의 상소를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단군을 시조로 한민족의 역사를 3천 년으로 소급해 중국 한족과 대등한 수준으로 역사시대를 정한 점. 둘째, 단군이 하늘에 명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는 천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셋째, 단군 조선의 넓이가 만리나 되는 대국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국가적 자긍심을 세웠다는 점이다. 그런데, 후에 실록을 기록한 한 사관은 이런 변계량에 대해 인격적인 모욕까지 서슴지 않았다.


변계량이 부처에 혹惑하고 신神에 아첨하며, 하늘에 배례拜禮하고 별에 배례하여 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심지어 동국東國에서 하늘에 제사하자는 설說을 힘써 주장하니, 분수를 범하고 예를 잃음을 알지 못함이 아닌데, 한갓 억지의 글로써 올바른 이치를 빼앗으려 한 것뿐이다. (태종 31권 16년 6월 1일)


위 맥락을 이해했다면, 사관의 역사관이 사대주의에 절어 있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내 것을 잃어버리고 나를 찾지 못하면서도 도리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관의 태도는 마치 일제 식민사관의 쌍둥이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런데 변계량의 사후 13년, 우리의 세종대왕께서 등장하신다. 그동안 ‘예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세종대왕(25년)께서 도리어 변계량의 상소를 근거해 천제를 올릴 것을 명한다. 여전히 반대에 부딪혔지만, 세종은 재차 삼차 논의를 거듭하며 천제를 올릴 것을 명한다. 실제 그 결과로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이후 세조 때에 원구단을 짓고 천제를 올렸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즉 ‘조선 초기에 사대는 명나라와 외교적 관계를 안정시키면서 내적인 발전을 꾀하는 실용주의로 보아야 하며, 오히려 주자학적 명분론과 중화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내면에 흐르고 있었다(김홍경, 1996). 그러나 중종 때에 들어, 사림파 유학자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면서 사대는 실용주의가 아닌 명분론으로 점차 흐르게 된다. 조광조가 소격서를 폐지한 것도 이쯤의 일이다. 물론 천제에 대한 기록 또한 실록에서 점차 사라진다. 조광조가 조선 개혁정치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폐지를 주장하고 결국 그 뜻을 이룬 소격소는 도교 사원의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다. 도교와 유교의 천지 우주의 주재자 하느님은 '상제'로 동일한 대상이다. 정리하면 조광조 또한 사대주의에 입각해 세종대왕께서 소격서를 통해 상제님을 지속적으로 모셔온 것이 잘못이고, 제후국에서는 천제를 지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천제 의례가 가지는 정치적 시대적 상징을 생각하면 조광조가 든 기타 다른 이유는 사실 핑계에 불과하다.


천자天子의 나라, 동이東夷

그런데, 유자儒者들이 ‘천자天子만이 천지에 제사를 올릴 수 있다’며 반대했던 ‘천자’는 정말 중국의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을까? 『서경』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歲二月 東巡守 至于岱宗柴 望秩于山川 肆覲東后 (『서경書經』 순전舜典 中)


유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군으로 칭송해 온 순舜임금은 보위에 오를 때 태산에 올라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동방의 천자’를 찾아가 조근朝覲하는 예를 올렸다. 동후의 후는 ‘제후 후侯’가 아닌 ‘임금 후后’이다. 또한 ‘근覲’이란 ‘제후가 천자를 뵙는다.’는 뜻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뵙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때 순임금이 알현한 동방의 천자는 누구일까? 바로 고조선(BCE 2333~BCE238)의 단군왕검이다. 즉 순은 단군 조의 제후였음을 알 수 있다.


至檀君王儉, 與唐堯並世. 堯德益衰, 來與爭地不休.

天王乃命虞舜, 分土而治, 遺兵而屯, 約以共伐唐堯,

堯乃力屈, 依舜而保命, 以國讓


당시 단군왕검은 당요와 나란히 천하에 군림하고 있었으며, 두 민족 간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단군성조께서는 동이족이었던 우순에게 명하여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보내 주둔시켰다. 아울러 그와 함께 당요를 정벌코자 언약하니 마침내 요임금이 통치력이 다하여 굴복하고, 순에 의지해 목숨을 보존하고 나라를 남겨주었다. (이맥 李陌 『태백일사』)


또한 후한시대 채옹은 『독단獨斷』에서 천자 제도의 근원에 대해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天子, 夷狄之所稱, 父天母地故, 稱天子)”고 하여 천자 제도가 동방족 문화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만주 집안현에 1500년 동안 굳건히 서있는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고구려 창업의 시조 고주몽에 대해 ‘천제지자天帝之子, 황천지자皇天之子’란 기록이 분명히 남아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손, 천제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던 천손天孫민족이었다.


천자의 색-자紫

중국의 역대 임금들은 제위에 오른 뒤 태산에 올라 상제님께 등극을 고하는 제천의식을 행했는데, 이를 봉선封禪의식이라 한다. 지금도 태산 옥황정을 오르는 길목에는 자기동래紫氣東來라 적힌 현판이 있다. 자줏빛 자紫는 천자를 상징한다. 즉 자기동래란 상제 문화가 동방에서 왔다는 뜻이다.


서양에서도 자색을 ‘천상의 색’이라 한다. 서양의 자색 계열은 퍼플 purple, 즉 보라색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 ‘푸르푸라(purpura)’, 그리스어 ‘포르피라(porphyra)’로 빛의 순수함을 뜻한다. 빛은 바로 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born to the purple’은 ‘황제의 집에서 태어나다’라는 뜻이 되고, ‘raised to the purple’이라고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박세은, 패션 칼럼니스트). 동서양이 제왕 문화는 천상의 색(자색)에서 공통분모를 이룬다.


이쯤에서 서두에서 말한 첨예한 논쟁, 바로 민족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세계화와 민족주의

민족주의가 외세에 대항하는 정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타민족에 대해 상대적이고, 배타적인 면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민족주의를 내분의 도화선으로 보기도 한다. 심지어 제국주의 국가도 민족주의를 악용하기도 했다. 다른 민족을 자국의 지배하에 두려 하는 제국주의 특성상, 자기 민족의 힘을 과시하고 권위를 높이기 위해 민족주의를 악용한 것이다. 간혹 어떤 이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같은 선상에서 논의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나 분열주의로 이해하거나, 세계화 흐름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혈통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 언어 등 '다양한 동질성'으로 맺어진 ‘민족民族’은 엄연히 있어 왔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비록 ‘민족民族’이란 어휘가 없었을지언정, 역사 이래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별이 없을 순 없다.


존 네이스비트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세계절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편주의․세계주의 대 지역주의․부족주의의 역설적인 조화, 이것이 우리에게 ‘기회와 도전’의 비전으로 던져진 글로벌 패러독스의 모습이다. 지역적(부족적)으로 사고하고 세계적으로 행동하라. (정성호 옮김,『글로벌 패러독스』)


실제 세계화와 민족주의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지난날 이는 세계사를 싣고 달려가는 양 수레바퀴와 같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때는 방향을 잃고 수레는 쓰러졌다. 지나친 국수주의는 제국주의를 낳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잃을 때는 외세에 침략을 받았다. 그렇다면 자기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세우면서도 다른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유쾌한 민족주의를 추구할 방법은 없을까? 나는 유쾌한 민족주의! 상생의 민족주의에 해답이 있다고 본다.


문명개화삼천국文明開化三千國


문명개화삼천국萬國活計南朝鮮

가을의 새 문명은 삼천 나라로 열려 꽃핀다.

앞 세상은 족속에 따라 나라를 세우리라.

벼슬은 넘나들지라도 왕은 제 나라 사람이 하여야 한다.


증산도의 경전 <도전道典>에는 다가올 시대는 모든 민족이 제 뿌리를 찾아 민족 단위로 나라를 세우며, 문명개화삼천국萬國活計南朝鮮을 이룬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가장 다양한 문화를 꽃피우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을 살펴보면, 인류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지만, 동시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억압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문화를 존중하며 정치권을 가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그러한 세상이라면 그 문화를 펼쳐나갈 이들은 분명 국수주의자들이 아닐 것이다.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고 끝없이 샘솟는 수원水源과 같은 문화창조의 힘을 가진 이들일 것이다. 관용과 포용의 문화의식을 가진 높은 문화의 힘을 한국인이, 한국인으로부터 펼쳐나갈 수는 없을까?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에 합당한 문화자원, 문명 원형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데, 우리 자아상이 그에 부합할까?


應須祖宗太昊伏(응수조종태호복)인댄

何事道人多佛歌(하사도인다불가)오

마땅히 선천 문명의 조종(祖宗)은 태호 복희씨인데

웬일로 도 닦는 자들이 허다히 부처 타령들이냐! (道典 5:282:3)


'인류문명의 시조는 태호복희씨이다. 그런데 자신의 문화주권을 잃어버리고서 허구언날 부처 타령인가!'

태호복희씨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의 막내아들이시다. 태호복희씨께서 서방에 문명을 개척하실 때, 하수에서 우주 변화의 도상을 드러내는 용마를 만난다. 이를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리셨는데, 이것이 하도이다. 복희씨께서 자연의 법칙을 상수의 원리로 밝힘으로써 역학과 음양오행의 학통이 이어지게 된다.

'인류문명 조종'이라 함은 당연히 동양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이 지나 예수회 선교사 부베를 통해 역경이 서구에 전해진다. 역경은 이진법을 창안한 라이프니치에게 전해져 오늘날 디지털 문화를 여는 화수분이 되었다. 닐스 보어는 주역의 이치에서 양자역학을 창안했다. 보어는 팔괘 문장이 들어간 옷을 입고 노벨상을 수행했으며, 귀족 작위를 받을 때에도 태극문양이 들어간 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너무나 방대한 역사이기에 때문에 각설하도록 하자. 주지해야 할 점은 '인류 문명사를 여신 조종祖宗이 바로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국수적이거나, 과거의 영광에 젖고자 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커발환 환웅께서 밝은 땅에 배달나라를 세우실 때,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가르침은 현재 진행형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완료형 과제이다.

우리가 문명개화삼천국文明開化三千國, 그 상생相生의 새 문화를 열어갈 수 있는 준비 되었는지 자문해본다. 지난 100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의 여러 약소국이 민족의 자주정신을 배양하고 근대화를 추구해왔다. 지난한 시간이었지만, 또한 문화와 종교와 이념의 벽을 깨어온 자기 극복의 과정이었다. 과거 역사는 미래의 자원을 품고 있는 광맥이다. 어떤 옥석을 가려내어, 어떤 미래를 지향하는가에 따라 인류가 걸어온 역사의 가치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 한민족에게 이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난 100년은 나약한 역사의식에서 깨어나, 대한인으로서 자아상을 회복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선 이제 누군가가 ‘무엇이 한국적인가, 한국인은 누구인가’를 물어올 때, 음악과 드라마 같은 상업적인 문화콘텐츠에 담긴 따뜻함, 가족애 같은 정서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런 소프트 파워를 끝없이 쏟아내는 근원, 문화원형에 대해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누가 당신네는 어떤 민족입니까 묻는다면, '딜리버리 민족'이라 하는 것은 그저 한번 웃는 농담 정도로 그치자. 대신 우리 마음속에는 배달민족으로서 분명한 자아상이 세워져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을 여러분께 던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원구단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