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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단의 비밀

by 오후의 책방

세상은 신을 지키려는 사람과 신을 죽이는 사람들과의 전쟁이다. 어떤 이에게는 돈이, 권력이, 과학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이 글의 초안을 쓴 것은 10년 전이다. 월간 <개벽>에 2010년 4월부터 10월까지 7차례 칼럼을 싣고, 나름 할만큼 했다는 안도감으로 잊은 글이었다. 몇일 전 편집장님께 원고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세월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묵은 글을 다시 날카롭게 갈아야겠다 다짐했다. 지난 10년 동안 세상은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빠른 속도로 잊어가는 듯 하다. '나'라는 사람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다. 나의 이야기는 작은 우물에 떨어진 낙엽처럼 미약할 뿐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다시 글을 쓴다.

신이 죽은 시대에 신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하나님 문화의 고향이 한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역사를 잃어버린 한국인에게 진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안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다.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우리 미래를 향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 11 27, 새벽부터 잠을 설치며 서울 소공동을 향해 차를 내몰았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이었다. 필경 가을 끝자락을 알리는 비가 발걸음을 더디게 할 거란 생각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아! 100년 만의 원구대제…, 아마 수만의 인파가 몰리겠지.’

취재를 위해선 조금이라도 앞자리를 차지해야겠기에, 출근길 서울교통체증이 원망스러웠다. 11시, 소공동 웨스턴 조선호텔 황궁우 터에 서서히 인파가 모여들었다. 차가운 겨울비를 피하는 우산들이 삼삼오오 서로 몸을 부대끼며, 황궁우 터를 채우기 시작했다. 고작 한 채의 건물과 그를 둘러싼 잔디밭이 전부인 곳이지만, 이곳이 가진 역사적 의미는 얼마나 크던가. 그러나 예상과 달리 참례인원은 더 이상 늘지 않았다. 300여명 남짓한 참례객 대부분은 이 날 행사를 주관했던 전주이씨 종약원측 사람들이었다. 12시, 이원(의친왕의 손자)씨를 비롯한 58명의 제관들이 자리하고 황궁우에 모셔진 황천상제님께 제례의 시작을 고告했다. 마침내 1910년 일제에 의해 중단된 원구대제가 100여년 만에 다시 봉행된 것이다.


행사 막바지 쯤에 참례객 몇 분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이런 국가적인 행사가 있는데 너무 모르고 있어요.’

‘그냥 이런 걸 한다기에 잠깐 들러 봤습니다. 전 잘 몰라요.’


기대에 못 미친 행사규모도 실망이었지만 인터뷰를 마친 후엔 설명할 수 없는 가슴 먹먹함이 밀려왔다. 황궁우의 하늘을 가린 마천루를 올려다보다 문득, 창문을 통해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와 내가 알고 있는 역사의 기억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잃어버린 역사의 간격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무엇을 되찾아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대한인大韓人의 정체성이란…

2002년 월드컵, 붉은악마의 응원 북소리와 함께 세계에 울려 퍼진 이름 “대한민국大韓民國”, 그로부터 8년 뒤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대한大韓’의 이름이 다시 세계 속에 울려 퍼졌다. 다른 나라 대표팀이 ‘애국가’를 외울 정도가 됐을 거란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대한민국은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스포츠 강국으로써의 위상을 높였다. 스포츠 경기 결과는 국가경쟁력의 잣대로 평가받는다. 국가 정책과 재정적인 지원이 스포츠 산업 발전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남북분단이 빚어낸 한국전쟁으로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아야했던 최빈국 한국은 2010년 11월에 열리는 G20(세계금융정상회담)의 개최국이자 의장국이 되었다. 100년 전 제국주의 열강의 잔칫상에서 누란累卵처럼 위태로웠던 조선이 이제 명실상부 세계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한국을 벤치마킹하자’라는 슬로건을 걸고, 한국을 찾는 나라는 개발도상국뿐만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 같이 이미 성장의 꼭짓점에 도달한 국가들도 포함된다. 스포츠, 경제/경영, 전통문화 등 그 범주도 다양하다. 유르겐 뵐러(한독상공회의소 사무총장)는 ‘한국의 힘’을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이는 순발력 열린 마음 그리고 전통 문화적 자산에 있다고 했다.

전통과 현대가 비빔밥처럼 어우러져 세계문화의 용광로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 일제강점과 분단의 100년사를 해쳐가며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한국인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질문은 한국인을 한국인이게끔 하는 그 것, 바로 민족정체성(National Identity)에 대한 물음이다.

이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할 수 있는가?

前 한국천문연구원장 박석재 박사는 미국 유학시절 한 외국인이 '한국인의 민족정신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같은 질문을 주위 한국인들에게 수없이 던져보며 그것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역사학자 마가렛 맥밀런은 ‘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속하거나, 스스로 속한 공동체에서 자기 정체성의 대부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이 과거를 밝히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다면, 현재는 과거를 품에 안은 채 미래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역사의 미래를 개척한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간다.'고 할 때, 무엇을 가지고 하는가? 그 밑천은 인류문화의 유산, 전통이다.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과거의 황금맥을 개발해야 한다. 인류문화의 뿌리로부터, 문명의 극적인 번성기에 드러나고 있는 갖가지의 문명창조의 배경적인 힘, 문화와 역사적인 힘, 그 진액을 뽑을 줄 알아야 한다. 시원을 잘 보고 근본으로 돌아가서 진액을, 진리의 뿌리자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 안경전 상생문화연구소 이사장/ 환단고기 완역본 역주자


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역사를 거슬러 가다보면, 인류 시원문명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는 상제님 모시고, 그 가르침을 내려받아, 하늘의 이상을 이 땅에 실현시키고자 했던 인류문화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그 핵심이 바로 ‘상제문화上帝文化’이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과 사대주의에 의해, 우리 스스로 자신을 부정했던 기나긴 세월이 있었다. 상제문화를 지키고, 맥을 이으려 했던 이들은 어두운 동굴 속을 촛불하나 없이 들어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한韓민족’이라고 하지만, 한韓의 의미와 유래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이가 드물다. 이제 이런 의문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한국인과 인류문화의 황금맥 ‘상제문화’를 찾아가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열쇠는 대한제국과 원구단에 있다.


고종, 나약한 군주인가?

1896년(건양 1년) 2월 11일, 고종은 세자와 함께 궁녀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이후 정세는 돌변했다.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일제의 독주는 끝이 났다. 일제는 고종의 치밀한 전략에 꼼짝없이 당한 셈이었다. 고종의 아관파천 기간 중에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열망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백성들은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한편 황제로 즉위할 것을 요청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다면, 그것은 명실상부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종 스스로도 파천 직후부터 환궁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 곳은 을미사변의 악몽이 서린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이었다. 8월에 이르러 경복궁에 모시고 있던 명성황후의 혼백과 유골 그리고 어진도 경운궁으로 옮기게 했다. 왕실 관행상, 왕이 다른 궁궐로 옮기게 되면 먼저 어진을 옮기는 것이었기에 이것은 고종이 조만간 경운궁으로 환궁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듬해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그리고 다시 8개월 후인 10월 12일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황제에 올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공인받는 황제의 나라가 된 것이다.

고종황제와 원구단


그동안 이 ‘황제국 선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다수였다. 일제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해 경복궁을 점령했고, 나아가 조선의 자주권 확보라는 미명하에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했다. 당시 조선이 황제국을 선언한다는 것은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그것은 반대로 일제가 조선을 차지하는데 용이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실제 당시 일본공사 대조규개大鳥圭介는 고종에게 황제에 즉위할 것은 물론, 연호의 사용과 단발斷髮 등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즉 고종이 황제국을 선언한 것은 일제에 의도하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진실일까?


정유(1897)년 음력 9월 17일(계묘), 임금이 황제에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고쳐 대한大韓이라고 하였다. 을미년(1895) 이래로 정부에서 임금의 뜻을 헤아려 칭제稱帝할 것을 권하였는데, 아국(러시아), 법국(프랑스), 미국의 공사들이 한결같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했으며, 일본 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 또한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삼포오루가 죄를 짓고 떠나자 조정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서 의전의 절차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각국 공사들이 이를 강력히 저지하고 나왔다. 아국 공사는 “귀국이 굳이 참칭僭稱하고자 한다면 우리 아국은 외교관계를 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두려워했으나 거의 일이 이루어지는 단계에서 저지당하는 것은 매우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에 신료들에게 넌지시 뜻을 내려 연이어서 주청하도록 하여, 마치 임금이 뜻을 굽혀 중론을 따르는 것같이 하려고 하였다. 이에 기로대신耆老大臣 김재현 등이 연명해서 소를 올리고 의정 심순택과 특진관 조병세가 따라서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다. (『매천야록』, 황현)


조선왕조실록 고종 36권과 매천야록을 보면, 심순택 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황제로 칭할 것을 고하고, 그 다음날 다섯 차례 또 다음날 두 차례 아뢰어 마침내 교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관파천 이전 시기,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고종은 황제 즉위를 거부했다. ‘황제’ 대신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고종은 일제의 강요에 의한 황제 즉위는 거부했지만 아관파천으로 일제의 간섭에서 벗어난 고종은 황제 즉위에 필요한 상황을 능동적으로 조성해 나갔다. 비록 고종이 ‘말이 옳지 못하다.’고 겉으로 거부하는 듯 보였지만, 속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이에 조정 중신들까지 황제 즉위를 요청하게 되었고 급기야 수백 명의 연명상소문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월 2일에는 조정 중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황제 즉위를 간청하기에 이른다. 풍전등화 같은 망국의 기로에서 일제와 주변강대국의 협박과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은 ‘황제국’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추진한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는 학자에 따라 엇갈린다. 심지어 일제 강점의 원인을 고종과 대한제국에 돌리려는 이들도 있다.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실패한, 시대착오적’이란 꼬리표가 과연 합당한 것일까? 역사의 평가는 가폄자폄이 원칙이다. 잘한 것은 잘한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한일병합조약문」 제5조를 보자. 여기엔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恩級을 부여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이들 ‘훈공 있는 자들’이란 국망의 위기에서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키기는커녕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적극 협조한 인물들이다.


신황제가 즉위한 뒤(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킴) 개각改閣을 단행하였으나 모두 저들이 멋대로 조작한 것이었다. 총리대신에 이완용, 내부대신에 송병준, 탁지부대신에 고영희, 군부대신에 이병무, 내부대신에 송병준, 탁지부 대신에 고영희 … 중략 … 13도장관, 360주의 군수까지도 모두 저들의 친족과 인아(사돈) 그리고 사돈의 사돈까지 줄줄이 차지하게 하였다. (『남가몽』 中, 정완덕(고종과 순종을 모셨던 시종원 부경))


이들 76명 중 소속을 알 수 있는 64명 가운데 56명이 노론이다.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은 노론 당파의 일부 후예들이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친명사대주의를 친일사대주의로 전환한 것이 ‘일제식민사관’이라고 분석했다. 노론계열의 친일파는 해방 이후에도 학문적 권력을 독점하고 일제 식민사관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의 정치행위를 비판하면 그것이 오히려 일제식민사관이라는 적반하장의 논리를 만들어내어 노론을 비호해왔다. 일제에 부역한 이들과 이들의 후손이 광복이후에도 정관학계의 주류를 차지했다. 이들이 고종에 대해 ‘나약한 군주’,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배를 가져온 군주’라는 비판을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나라는 광복 했으나, 역사는 광복하지 못했다'는 이덕일 교수의 일갈은 일제식민주의 역사관의 덫에 걸려있는 사학계와 이들의 글과 말에 여전히 흔들리는 대중의 역사인식 수준을 함축한 표현이다.

대한大韓의 나라세움을 상제님께 고하다 - 원구제

고종이 우리나라가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원구대제’다. ‘황제皇帝’란, 나라를 통치하는 ‘천제지자(天子)’를 의미한다. 천자는 제정일치 시대의 통치자로, 인간세계를 대표하여 상제上帝(삼신상제, 하느님)님께 제사를 올렸고 제후들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사역했다. 즉 황제는 원구단에서 즉위하고 또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제님으로부터 통치 권한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당시 원구단 전경]

현재 왼쪽 황궁우만 남아 있다. 원구단 자리에 일제는 철도호텔(현 웨스턴조선호텔)을 세웠다.

제단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하늘에 제사 드리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를 드리는 단은 네모나게 쌓았다. 원구단圓丘壇은 이름 그대로 둥근 언덕같이 쌓은 단으로, 원단이라고도 했다. 또한 천자는 천제를 올린 후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 고종이 왕이 아닌 황제, 즉위한 원년을 광무光武 1년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연호를 갖는 것은 독자적인 우주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써 천자가 다스리는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본래 천자문화의 고향인 조선은 고조선 이후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천자칭호가 계승되어 왔다.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손, 천제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거듭된 침략을 받으면서 차츰 중국의 속방屬邦으로 전락해갔다. 다음 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결국 1464년, 세조 10년에 이르자 이듬해 원구제를 중단케 했다. 이후 원구제를 올렸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실록에는 국왕이 천제를 올리려할 때 마다 신하들이 제후국으로 천제를 올릴 수 없다며 반대하는 기록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丁亥 命停明年正月圜丘祭

임금이 명하여 내년 정월의 원구제園丘祭를 정지시켰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4권 10년)


郊祭, 禮之大者也 惟天子得以行之, 故魯之郊禘, 孔子非之, 聖人之訓, 至嚴且切

今此親祀南郊, 旣非諸侯之禮, 圓壇將築, 吉日已涓, 臣等於此, 不能無惑焉

교제郊祭는 예 가운데에서도 큰 것입니다. 오직 천자라야 행할 수가 있기 때문에 노魯나라의 교체郊禘를 공자가 비난하였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지극히 엄한 것입니다. 이번에 남교에 친히 제사를 지내려는 것은 이미 제후가 행할 수 있는 예가 아닌데, 원구단을 쌓으려 하고 날을 이미 잡았으니 신들은 이에 의혹스러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 106권 8년)


고대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던 천손의 민족은 조선 시대 내내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나약해져갔다. 빈약한 역사의식만큼이나 국력은 급격히 쇠약해지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이런 때에 고종은 원구대제를 통해 본연의 역사정신의 푯대를 세워 천자국의 황통을 회복하려 시도했다. 고종은 등극에 앞서 가장 먼저 원구단을 짓도록 하고, 원구대제의 절차와 예법을 정하도록 명했다. 또한 대신들에게 국호 개정문제를 제기했다. 황제에 즉위하는 역사적인 상황에 새로운 국호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고종은 옛날 고려 태조가 천명을 받아 삼한三韓을 하나의 나라로 통일했던 것처럼, 새로 천명을 받아 황제에 오르는 그 시점에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쳐 갈라진 국론과 민심을 대통합하여 새로운 도약의 전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중략…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조선왕조실록』 고종 36권, 34년 10월 13일)

원구단에 도착한 고종은 황천상제皇天上帝황지기皇地祇의 신위 앞에서 제사를 올린 후, 곤면과 옥쇄를 받는 의식을 치렀다. 더 이상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제후 왕이 아닌, 상제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은 천자가 된 것이다. 원구대제에 앞서 고종은 다음과 같은 조령詔令을 내렸다.


“오직 상제上帝가 날마다 여기를 내려 보고 있으니 마땅히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털끝만큼이라도 정성스럽지 못한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제가 내려와 그대를 보고 있으니, 그대는 딴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람들은 다만 하늘이 아득히 멀고 귀신이 은미하다는 것만 알 뿐이지 구석구석 훤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체로 정성이 있으면 감응이 있고 정성이 없으며 감응이 없으니, 제계하고 깨끗이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여 제사 받들기를, 마치 하늘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듯이 하여야 한다. 이것이 옛날의 성스럽고 밝은 제왕들은 하늘을 공경한 까닭으로 그 내용이 문헌에 상세히 실려 있다. 하늘과 사람은 원래 두 가지가 아니니, 성인은 바로 말을 하는 하늘이며 성인의 말은 곧 하늘의 말이다. 공경은 한결같은 것을 위주로 하며 한결같으면 정성스럽고 정성스러우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 지금 대사大祀를 당하여 백관百官과 집사執事들은 각자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4년 10월 9일)


상제님은 누구신가?

상제上帝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하느님(하나님)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인격적인 속성과 천天의 주재자로서 통치성이 강조된 말이다. ‘상제’라는 호칭에는 ‘천상에서 온 우주 삼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상上은 천상 또는 지존무상을 뜻하고, 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제帝 자는 흔히 ‘임금 제’자로 알고 있으나 원래는 ‘하나님 제’자다. 상제님은 바로 천상의 가장 높은 곳, 옥경에서 ‘우주정치’를 행하시는 주재자 하느님이다.

주재主宰’란 ‘주장할 주主’자에 ‘맡아서 마름질할 재宰’ 자다. 즉 상제는 천지의 살림살이를 맡아서 천지의 뜻을 주장하시는 분이다. 우주의 만사만물에는 반드시 중심되는 존재가 있다. 가정에 가장이 있고, 회사에 사장이 있고, 나라에 대통령이 있듯, 우주에는 그 중심에 ‘주재자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다.

동서양의 각 민족이나 종교에서 절대자, 메시아를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 각 문화권의 언어, 환경이 다르다보니, 호칭과 인식에 차이가 있을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최상위 또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는 언어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본체론의 관점에서도 둘일 수 없다. 상제의 ‘제帝’는 유교와 도교가 사상사적 갈래를 치기 이전부터 동방에서 하느님을 부르는 공식적인 호칭이었다. 고종이 원구제를 올리며 고했던 상제님은 다름 아닌 동방 한민족이 고대로부터 모셔왔던 하늘님, 하나님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제”의 호칭을 낯설어하고 상제문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대한大韓을 선포하고,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던 원구단 모습 또한 이제 제 모습이 아니다.

지난 2월 사전답사를 위해 원구단을 들르게 되었다. 고층 빌딩 사이에서 주차장을 찾기란 쉽지 않아, 한참을 헤맨 뒤에야 한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주차장 계단을 올라 온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황천상제를 비롯한 일월성신의 신위를 모신 황궁우 그 아래가, 바로 지하주차장이었던 것이다. 하늘은 고층 빌딩으로 가려지고, 땅 아래는 주차장이 되었다. 호텔 식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황궁우는 그저 꽤나 고풍스러운 정원쯤으로 취급받고 있다.


원구단의 시련

원구단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순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짤막한 기사만이 남아있다.


二十日 圜丘壇社稷署建物及敷地, 竝引繼于總督府

원구단圜丘壇, 사직서社稷署의 건물建物과 부지敷地를 모두 총독부總督府에 인계引繼하였다. (순종실록 부록 2권 4년(1911년 신해 / 일 명치明治 44년) 2월 20일)


날짜 옆에는 이전 실록에 보이지 않았던, 일본 명치 년의 날짜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지금부터 111년 전, 1910년 8월 29일에 경술국치, 한일병합이 공포된다.


“짐이 영원무궁한 큰 토대를 넓게 하고 국가의 비상한 예의를 마련하고자 하여 전 한국 황제韓國皇帝를 책봉하여 왕王으로 삼고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이라 칭하니 이후 이 융숭한 하사를 세습하여 그 종사宗祀를 받들게 하며, 황태자皇太子 및 장래 세사世嗣를 왕세자王世子로 삼으며, 태황제太皇帝를 태왕太王으로 삼아 덕수궁 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라 칭하고, 각각 그 배필을 왕비王妃, 태왕비太王妃 또는 왕세자비王世子妃로 삼아 모두 황족皇族의 예로써 대하여 특히 전하殿下라는 경칭敬稱을 사용하게 하니…”- 명치明治의 조령 中 (순종 부록 1권 3년(1910년 경술 / 일 명치明治 43년) 8월 29일)


황제가 왕으로, 황태자가 왕세자로 격하되었다. 대한제국을 일본의 제후국로 아니, 이제 대한제국이란 국호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원구단의 건물과 부지를 모두 총독부에 ‘인계引繼’한다. 협박과 강압으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생각해보면, 이 ‘인계’과정의 설움도 얼마나 컸을지 미뤄 짐작이 간다. 빼앗긴 원구단이 어떤 운명이 겪을지 이들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록이 짧아 그 전후 과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사관의 글이 이토록 짧은 것은 그 분함과 당혹스러움에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떨리는 붓 때문이었을 거란 위로도 해본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고 하던가. 그럼에도 승자가 파괴하고 불태운 진실의 잿더미와 마주할 때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다.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털썩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 한두 번 드는 것이 아니다.


원구단은 이후 더 참혹하게 파괴된다. 1913년 4월 일제는 원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짓는다(1914년 9월 30일 준공). 1910년 합방 후 대륙침략을 목적으로 각 방면으로 철도가 설치되자 경성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외국인들의 내왕이 많아지는데, 철도국에서는 외국인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이 호텔을 설립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렇다는 것이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천제를 올렸던 그 자리에 하필 투숙객을 받는 호텔을 짓는, 일제의 파렴치한 행각에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 철도호텔에서 내려다본 황궁우, 멀리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이후 환궁우는 철도호텔의 정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광복 후에도 원구단은 복원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나마 남아있는 황궁우마저 사라질 뻔한 위기가 있었다. 철도호텔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때까지 고급호텔로 그대로 사용된다. 그러다 1967년에 법인으로 전환되어, 이듬해 재건축을 하게 된다. 이곳이 원래 어떤 땅이었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당시 세계 유수의 호텔을 설계했던 건축가 타블러(william b. tabler)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그런데 이 건축가는 황궁우와 석고단을 이전하거나 철거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자문위원 중 한 명이었던 홍익대 故정인국 교수의 설득으로 다행히 보존되어 지금과 같은 배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1979년에 미국 웨스틴(Westin)호텔그룹의 투자관계에 의해 웨스틴조선호텔로 이름이 바뀌고, 1995년에 신세계가 웨스틴체인의 지분을 완전히 인수했다. 국유지가 어떻게 사유지가 되었는지, 또 보존에 신중해야 할 사적지에 지하 주차장이라니…. 황궁우의 기단은 기울어지고, 주변 돌난간은 환풍기 바람에 새까맣게 변해가고 있다. 두세 명의 관리원이 있어 황궁우 내부를 촬영할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관리 담당인 중구청 녹지과의 허락을 받고 촬영일정을 알려달라고 했다. 비록 먼 길을 다시 찾아와야 하겠지만, 오히려 그런 깐깐함이 감사하다.


대한大韓의 의미

고종의 황제즉위식 날, 경운궁의 인화문에서 소공동 원구단에 이르는 거리에는 병사들이 도열하여 고종의 행차를 호위했다. 한양 시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와 등불을 높이 내걸고 고종의 황제 즉위를 환영했다. 고종의 명으로 태극기가 처음 제작되어 서울의 거리를 태극기로 가득 덮은 때가 바로 이때였으리라. 그로부터 105년 뒤 2002년 월드컵, 그 거리가 다시 태극기로 일렁였다. 발과 심장이 함께 뛰며 온 국민이 함께 목청껏 외쳤던, 대한민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바로 ‘대한제국’에서 비롯되었다. 대한大韓(Great Corea)은 그저 단순히 ‘위대하다Great’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광명’을 뜻한다. ‘대한민국’은 ‘밝은 하늘, 밝은 땅에 사는 밝은 사람의 나라’라는 뜻이다. 한민족은 이처럼 광명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또한 이 광명은 하늘과 땅의 꿈을 이루는 인간의 광명을 말한다. 나라 세움을 천지신명에게 고하고 그 꿈을 국호大韓노래[愛國歌]국기[太極旗]에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천체를 이용해 만들어진 국기는 꽤 많다. 예컨대 일본의 국기는 해를, 중국의 국기는 5개의 별을 이용하고 있다. 반면 태극기는 세계의 수많은 국기 중에 유일하게 ‘우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애국가는 하늘(상제)님을 숭상하는 지고지순한 신앙심, 영성을 말해주고 있다. 고종황제가 반포한 우리나라 최초의 애국가는 나라의 태평과 자주독립이 영원무궁하기를 상제님께 기도드리고 있다.

샹뎨는 우리나라를 도으소셔

영원 무궁토록 나라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야

위권이 셰상에 떨치여 독립 자유 부강을 일신케하소셔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대한의 이름을 세우고 1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위대한 도약을 했다. 세계경제의 총체적인 위기와 분쟁 위험이 날로 높아져가고 있는 남북분단의 현실, 그리고 코로나19가 가져온 패러다임의 변화, 이제 대한민국은 새로운 변혁의 시간대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CEO들이 지구촌 문명의 총체적인 위기를 직감하고 있지만, 정작 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찾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커다란 위기는 그에 상응하는 커다란 기회를 수반하기 마련이며, 지금보다 더 발전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러한 기회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앨빈 토플러 미래학자


‘지금 나타나고 있는 징후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만, 그것은 죽음의 징후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탄생의 징후일 것이다.’- 레이먼드 플레처 유럽평의회 부의장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본 지성들은 ‘지금 드러나고 있는 총체적인 위기를 통해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고방식과 잘못된 체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며, 이런 현상이 완전히 새로운 사회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서두에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인이게끔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미래를 열어갈 문화창조의 황금맥을 찾는 관문의 첫번째 열쇠를 ‘원구단’에서 찾고자 했다. 소공동 원구단은 한국의 속과 겉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또 한편 봄꽃을 피울 흙마저 파헤쳐진 제천단

잊지 말았으면, 우리가 그렇게 뜨겁게 외쳤던 ‘대한민국’은 마천루 그늘에 가려진 이곳 소공동 원구단에서 시작되었음을... 문화강국의 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누구인지 잊지 않아야 가능하다는 것을


우주의 주재자인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며 나라를 건국했던 단군조선, 원구대제를 통해 대한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고종. 하늘과 땅을 부모로 섬겼던 한국인 삶의 모든 문제의 본질을 하늘과 땅에서 찾고자 했다. 천지의 자녀로 태어난 인간이 천지의 꿈과 이상을 이루는 인간-대한大韓 임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나라, 대한민국. 그 이름에 합당한 한국이 되기 위해, 아직 맞추어야할 퍼즐들이 남아 있다.


‘제2편 천자天子의 나라 동이東夷’에서 -는 그 두번째 퍼즐을 조선건국 시기에서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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