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7단계 (2)
1단계 놀이독서 - 책 읽는 과정이 재미, 놀이가 되는 독서 : 동화, 만화, 전기
2단계 지식독서 - 지식의 범위와 이해를 넓혀가는 독서 : 과학, 자연관찰, 역사
3단계 문장독서 - 어휘와 문장의 매력에 빠지는 독서 : 소설, 시
4단계 사유독서 - 사유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독서 : 철학, 고전, 신학, 역사
5단계 비평독서 - 자기의 관점을 단련하는 독서 : 사회, 정치, 역사
6단계 비우는 독서 - 생각과 마음의 경계, 한계를 허물어가는 독서 : 종교, 경전, 고전
7단계 글 너머 독서 - 시, 만트라, 역사 그리고 ( 당신의 그 무엇 )
세 번째 문장독서는 언어의 매력을 느끼는 독서입니다. 문장의 리듬, 문체가 주는 감성을 느끼고, 좋아하는 문장의 작가가 생기기도 합니다. 작가라고 하면 으레 소설가나 시인을 떠올리지만 장르 상관없이 문장이 아름답고 개성있는 작가가 참 많습니다. 생각이 글로 옮겨지는 과정은 기적과 같습니다. 동시에 한계를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비유하자면 둥근 지구가 납작한 지구가 되는 순간입니다. 4차원의 생각을 3차원의 연필로 2차원의 평면에 써 내려갈 때, 거듭 잃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을 부여잡기 위해 고쳐쓰기를 반복합니다. 브런치 작가님들은 글을 쓰고 있거나, 쓰고자 하는 분들일 테니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하셨을 겁니다.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고, 지혜로운 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극적으로는 '나는 누구이며, 내가 살아가는 이 우주는 어떻게 변해가는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경전과 고전에는 깨달음을 전해주시는 스승들께서 신과의 일체, 우주와 하나 되는 경계를 이야기 해줍니다.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와 신과 우주와 하나되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과학은 수치화 시각화하지 못하는 것은 연구대상으로 삼지 못합니다. 철학은 깨우침조차 대상화합니다. 세상을 읽는 눈과 귀를 갖기 위해서는 경험과 지식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비적 체험입니다. 사과의 맛을 알려면 직접 먹어봐야죠. 달고 시고 향기롭다는 설명을 해주는 것은 앎의 한계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 도교에서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라고 한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칸트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앎의 한계를 선 그었고,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를 논고하고,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연구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물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부분이 언어발달단계에 따른 독서능력단계와 비슷하지만, 굳이 '글너머 독서' 단계를 말씀드리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왜 책을 읽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늘 '책 너머에 가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글 너머'라면서 시나 만트라, 역사 등 왜 또다시 문자를 가져와 말하는가, 의문이 드실 겁니다. 우선 언어 너머에 닿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타고가야할 배는 언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직관, 심상, 감성 우리 안에서 떠오른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역설적으로 문자에 가두지 않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시詩입니다. 시는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또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마저 언어로 담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직접 들어간 이들이 진리 그 자체를 언어화한 것이 만트라(Mantra, 주문)입니다. 주문은 시 중에 시詩, 언어 중에 언어인 것이죠.
'역사'가 참 여러 번 반복되죠? 이 사람 참 역사 좋아하는구나 생각하실 것 같아요. '역사'는 독서가 동시적 사건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인류가 지식과 기억의 계승을 위해 문자를 만들고 기록을 남겼으니, 책과 역사는 사실 출발점이 동일합니다. 구전으로 전승되던 이야기는 문자로 옮겨진 후에야 '역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자연과 인간이 빚어내는 이야기의 만찬을 담은 그릇이라 비유할 수 있어요. 그래서 역사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깨진 그릇에 음식을 담을 수 없듯, 깨진 역사관은 민족과 개인의 자아상을 금가게 합니다. E. H. 카(Edward Hallett Ted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와 역사가의 관계를 조명하는 책이에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은 역사 사용자들-즉 역사를 이용하려는 자들에 의해 금이 갔습니다. 제국주의 시기 서구 열강이 세계 곳곳에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와 종교, 역사를 파괴했습어요. 이 못된 짓을 배운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세워 우리 역사를 왜곡, 축소, 말살할 때 사용했던 도구가 바로 실증주의 역사관이었습니다. 사료의 철저한 검증과 있는 그대로의 역사기술을 지향한다지만, 그들은 입맛대로, 목적에 따라 허위의 역사를 조작했습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에서 사유와 비평으로서의 역사로 넘어갈 때에 역사와 역사가의 관계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역사서를 읽을 때 저자의 역사관이 무엇인지 고려하지 않으면, 글 속에 숨어있는, 심지어 저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는 식민사관, 중화주의 사관, 저자의 의도적인 기술이 사실인양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과 편견은 재생산됩니다.
글너머 독서 단계에서 '역사'는 차이와 다양성을 아우르는 높은 안목이 필요합니다. 우주사적인 관점에서 인류사를 통찰하는 역사라고 하면 적절할까요? 어렵습니다. '글너머'라는 말처럼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겨우겨우 표현하자면 '우주의 역사와 더불어 우주의 과업을 함께 이뤄나가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지식의 박물관, 움베르트 에코는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를 기획하며 다음 명구를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들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
사유독서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가는 과정이라면, 비평독서는 자신의 망원경을 갖게 되는 독서입니다. 이 망원경을 '안목'이라고 불러보죠. 안목이라는 망원경에는 두 개의 렌즈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겸허'이고, 또 하나는 '자기 통찰'입니다. 비평을 위해서는 우선 이해해야 합니다. 이미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생각과 말을 관조할 수 없다면, 자칫 비평은 편견을 가진 비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빠진 독서는 학습능력을 위해, 성적을 위해 쓸모를 따지는 독서가 될 것입니다. 책이 쌓여가는 만큼 겸손과 더욱 멀어지겠지요. 높이 쌓은 지식은 지배를 위한 도구로 사용될 것이고, 변화의 흐름을 보는 안목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빠른 걸음이 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독서의 쓸모만를 따졌던 사람이 과학자가 되면 자연의 쓸모를 따질 것이며, 정치인이 되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권의 쓸모를 따질 것입니다. 자본을 다룬다면 세상의 무너질 위기에서도 이윤을 따질 것입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많습니다.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두 개의 렌즈를 가진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이런 이후에야 비움의 독서가 가능합니다.
종교를 왜 비움독서에 넣을 수 있느냐고 물으실 것 같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불교와 유교, 세상의 숱한 종교들은 서로를 적대적으로 보지 않느냐고요. 종교 원론주의는 영원이 배타적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요. 맞습니다. 다만 종교의 목적을 생각하면 반드시 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진리의 큰 물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갈래들이라고 생각해요. 각 문화권에서 그들만의 언어와 세계관으로 진리의 생명수를 뿌려 문화를 일구어 왔습니다. 인류문화는 소급해 종교문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종교조차 자연의 변화 속에 변천해왔습니다. 종교는 그 시대의 한계, 문화의 한계, 그리고 자연의 한계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도 노자의 가르침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들 성자들의 가르침 사이에 세워진 벽, 한계를 파악하고 허물어야 비로소 우리는 진짜 진리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갈래져 흐르던 물줄기가 큰 대양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듯, 지금은 이런 생각이 이미 널리 공감하는 시대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제 우리가 읽어야 할 텍스트는 종교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한계에 갇혀 서는 안됩니다. 금서의 시대는 지났거든요.
하루는 제가 '글 쓰는 사람'은 자기 공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아내가 크게 웃었습니다. 그렇게 호탕하게 웃는 걸 참 오랜만에 봤습니다. '감히 집에서 글을 쓰겠다고? 청소와 설거지 육아는 나 혼자 하란 말이냐! 남편!' 이런 의미였을 거라 짐작합니다. 웃음 뒤에 숨은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살짝 겁났지만, 용기를 내어 살짝 삐진 척했지요. 아내는 미안했는지 '그럼 아침 일찍 일어나 글 써'라며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허락해주었습니다. 비록 '나만의 공간'은 아니지만, '나만의 시간'은 얻을 수 있었네요. 저는 이 글을 새벽에 쓰고 있습니다.
그 어렵다는 하이데거나 화이트 해드의 철학도 읽고 사유하면 한 발짝씩 이해의 깊이가 더해가는데, 어떻게 아내는 함께하는 날이 늘어갈수록 애매함과 모호함의 광야가 드없이 넓게 펼쳐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그저 '눈치껏' 넙죽 엎드리는 게 부부 정치의 지혜입니다.
현실은 이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조차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지요. 진리 탐구의 욕구는 개인과 개인의 상호관계를 넘어 사회, 정치, 그리고 신과 인간의 존재 물음까지 나아갑니다. 마침내 현현묘묘한 우주 변화의 원리를 깨닫고자 합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깊은 산속에 들어가 면벽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지금 시대에는 그렇게 미련한 방법을 쓰진 말아야 합니다. 문화文化는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수만 년의 축적된 지혜입니다.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반복과 차이'를 거쳐 마침내 인류가 출현하고, 문명과 문화가 쌓아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책이 놓였습니다.
누가 만약 '야! 독서가 전부가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우선 따귀를 한 대 때리고, 정신을 좀 차린 것 같으면 따뜻하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책을 읽고서나 그런 이야길 해!
책조차 안 읽고서 어떻게 세상을 읽으려하니?
어떻게 자신을 읽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