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올 때 꼰대짓하면 추해진다

물러나는 중입니다

by 오후의 책방

“그거 다 핑계일 뿐입니다. 방법을 찾아내고 가능하게 만들어가는 게 피디의 역할이에요. 모든 과정이 설득의 과정이라고요.”


기획국장님은 커피 한잔을 핑계 삼아 일선 PD들과 자주 대화를 나눈다. 직원들의 불만, 업무가 막히는 지점이 어디인지, 업무환경을 어떻게 개선했으면 하는지 등, 오늘 회의 때도 고이 모아 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두어 개 사례를 드실 때, 나는 말을 끊고 발끈 성마른 비판을 한 것이다.

1초, 2초, 3초... 무표정이었던 국장님의 왼쪽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손아랫사람에게 조차 반말하지 않는 평조의 음조가, 살짝 한 톤 올라갔다.

“그래도 들어야죠. 핑계를 들어줘야 핑계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지 않겠어요?”

고개를 떨궜다. 단두대에 떨어지는 것 마냥, 성질머리도 잘려 떨어졌다.

‘아차차! 방금 내가 한 짓이 바로 꼰대 짓. 내가 꼰대였군. 젠장’


새로운 프로그램이 완성되기까지 가장 고비가 많은 단계가 Pre-Production이다.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지의 과정, 제작‘전’단계를 말한다. 여기엔 제작 기획, 출연자 섭외, 로케이션/세트 제작, 원고 대본 작성 등이 포함된다. 이 모든 과정은 설득의 과정이다. 우선 나 자신부터 설득되어야 한다. 이 주제가 지금 필요한가, 실현 가능성은 있는가, 시기적으로 적절한가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고심이 많을 수밖에. 이 시기에 나를 보면, 책을 뒤지고 있거나, 고개 숙이고 걷다가 먼 산보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답을 찾았으면 이젠 남을 설득해야 한다. 제작 윗선 스텝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시청자를 설득해야 한다.

그러니 진행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핑곗거리가 가장 많은 때이기도 하다. 아침에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세상천지 가장 힘든 사람도 있을 텐데, 아마 최소 그만큼은 ‘하지 못하는’, ‘하기 싫은’, ‘할 의욕이 떨어지는’ 이유가 많은 시기다. 내겐 이 고비를 넘으며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어왔다는 나름의 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게 말이다. 이런 부심이 꼰대가 되기에 제일 좋은 소재다. 라떼로 시작하는.


오늘 오랫동안 연기를 해 오신 베테랑 성우님이 안부 연락을 주셨다. 누구나 목소리를 들으면 아! 하고 떠올린 분이다. 사실 안부는 핑계이시고 맡을 일이 없는지 물어보실 의향이신 거다. 나는 이 전화가 그분께 참 어려운 전화라는 것을 안다. 연륜 많은 배우께서 초자 감독에게 일을 부탁하시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짐작한다. 커피나 한잔 하자는 말씀에 업무 일정상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당장 드릴 일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다. 전화를 끊고 미안한 마음이 한참 가시질 않아, PD단톡방에 혹시 녹음 업무가 있다면 연락을 달라고 공지했다. 그도 물러나고 있는 중이었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물러나고 있는 중이었다.


한 분야에 정점에 오르면, 운이 최고점에 이르면 그다음 수순은?

한 발 물러나는 과정밖에는 없다. 포태법이란 것이 있다. 인간과 우주만물의 생성과정을 12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기 때문에 12포태법, 또는 장생법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뱃속에 생기고 나고 자라, 세상에 관직을 얻고 물러나고 병들고 죽는 과정. 인생에는 사인 곡선처럼 올라가는 시기와 내려가는 시기가 있다. 장년,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기운을 쇠衰라고 한다. 올라갈 때는 겸손과 진실함을 무기로 삼고, 쇠의 시기 즉 내려갈 때에는 온후함과 자비를 계단 삼아야 한다. 내려갈 때 꼰대짓하면 추해진다. 아뿔싸! 나의 부심이 알고 보니 돌부리였네! 제법 잘 내려오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 꼰대가 굴러 떨어졌다.


베테랑 성우님은 한때 내가 얼마나 잘 나갔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늘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커피 한잔 하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후회됐다. 커피 한잔을 핑계로, 핑계를 들어주지 못하고 있었던 나의 부심이 후회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