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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Jul 14. 2021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 수학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선생님은 교무실이 아니라 도서관 앞 벤치로 데리고 가셨다. 야간자습을 하기 전,뉘엿 저녁놀이 피어오르는 시간. 영화 신세계의 중구였다면 ‘거 대화하기 딱 좋은 시간이네’라고 할 즈음이었다. 나는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담받아야 할 학생’이었다.

“너는 수업태도가 참 좋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성적은 참 안 좋아”


 참 선생님도 뭘 그렇게 대놓고 말하시는지,

그런데  같은 애가 대학에서 수학을 해야 .”

 성적이 좋지 못하면 대개 2쯤엔 수학을 포기할텐데,  정말 수학이 좋았다.  좋아하는  포기할  없지 않은가. 수학시간이면 선생님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칠까 귀쫑긋 세워 들었다. 다만 성적은 중학교 3학년    반짝 좋았다가 점점 멀어진 교차선이었다. 첫사랑 같은….

 선생님은 당신의 모교에 원서를 넣어볼 것을 권하셨다. 당장의 성적보다는 수학을 대하는 태도에 가능성을 두셨던 것 같다. 그리고 은밀히 말씀하셨다.

"이번 마지막 기말 시험, 단원 **페이지에서 낼 거야. 잘 준비해."

선.생.뉨. 당신은 정녕 이토록 저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셨고, 바로 다음 수업시간에 모두에게 공개하셨다. 어찌되었든, 절대평가인 내신에서, 나만 잘 준비하면 마지막 기말시험은 100점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80점을 받았다. 만족했다. 물론 대개 상위권들은 95점, 100점을 받았지만, 나는 만족했다. 내신에서 제일 큰 점수를 차지하는 수학에서 80점을 넘어본 건 2학년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시는 듯 나를 아련히 쳐다보셨다. 그리고는 고뇌에 찬 신음을 토해내셨다. "도대체, 너는... 크흠.."

 시험이 아무리 쉬워도, 아무리 어려워도  비슷한 점수를 내는  하나의 과목이 있었다. 국어였다. 국어는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통틀어  한번도 시험공부를  적이 없었다. 조금은 오르내림이 있었던 내신에 비해, 수능 점수는 한결같았다. 96 대입 수능, 시험을 마치고 나오니 선생님은 "웃으며 나오는 녀석은  밖에 없다. 어떻게  거냐?"라고 물었을 정도. 이날 1교시 언어능력 시험을 마치고 시험장을 나가버린 학생이 수두룩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수능시험이 정식으로 도입된    되지 않았던 시기라 난이도 조절이 적절치 않았다는 평가였다. 이런 자기자랑재수 없는  알지만, 수학에는 잼병이  감안해서 좀 봐주시길,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국어는  한번 시험공부한 적이 없었다.

 

 언어능력과 과연 상관관계가 있는지 애매하지만, 연애편지도  썼다.  에피소드는 이렇게 말해버리기엔 좀 까운데 까짓   나온 김에 풀어보자. 군정시절 삼청교육대와 비교되었던 교련시간에 감히 겁도 없이 연애편지를 몰래 쓰다가, 선생님께 발각되었다. 짝사랑에 애타는 마음을  문장  문장 눌러 써내려가고 있었던  표정은 진지했다. 교련 선생님은 성적과 관련 없는 교련을 이렇게도 열심히 하는구나 칭찬하려 가까이 오셨다가, 실체를 파악하곤 최상급 욕설과 고함을 내지르셨다. 나는 교무실로 연행(?)되어 모든 선생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애편지를 낭독해야 했다. 끌끌  차던 소리는 낭독이 계속될수록 감탄으로 변해갔다. 상상해 보라. 지금의  나이쯤 되는 중년, 노땅들이 소년 감성으로 젖어들어가는 광경을.

- 캬~ 히야~, -좋네, -김쌤요, 을릉 받아 적으라~.

 종소리와 함께 소년 감성을 떨쳐낸 선생님들은 울그락불그락 부끄러움에 폭발 직전인 나를 한 대씩 쥐어박았다. "그 재주로 공부를 해라, 이 자슥아."

 문학 선생님은 종종 "야, 연애편지"라고 놀리셨지만, '사랑을 '사랑'이라고 쓰면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하지만 잘 썼어'라고도 하셨다. 꾸지람보단 작문법을 집어주셨고 뒤이은 칭찬에 난 좋아했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노트를 누군가 낚아챘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 담임 쌤, 국어 선생님이셨다. 아직 기억이 난다, 그때 쓴 산문시의 첫 구절.

'딸아이를 위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건 꾸지람뿐이었습니다.'

 큰누님이 타지에 간뒤 아버지는 무척 쓸쓸해 보이셨다. 어쩌다 집에 들른 누님께 아버지는 잔소리부터 늘어놓으셨고, 누님은 울었고 화냈다. 누님이 가고 나면 아버지는 다시 쓸쓸해지셨다. 그때의 상황을 글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노트를 가슴께까지 들고 첫 문장을 낭독하셨다. 그리고 다음 문장부터는 눈으로 읽으셨다. 노트를 내려놓으며 물으셨다. '네가 썼니?' - 네. '다른 노트도 있니?' - 아뇨, 이것 밖엔요.

긴 막대기로 따닥따닥, 생각을 짚듯 바닥을 짚어 가시던 선생님은 멈춰 돌아보셨다.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시험을 쳤고, 대학에 갔고 군대를 갔고 가끔 연애편지를 썼다. 또 시험을 치고 직업을 구했고, 결혼했다.

 선생님께서 멈추지 마라고 하셨던 일은 계속 멈추어 있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님의 말이다. 연애편지 사건으로 종결되었던 짝사랑처럼 수학은 미련이 남았다. 지금의 내게 아무런 실효가 없는 벤 올린의 <이상한 수학책>을 구입하거나, 정승재의 팬인 이유도 이 때문일 테다. 콤플렉스처럼, 자조 섞인 농담이 있는데, "나 서울대 못 간 건 수학 때문이었어."다. 내가 왜 이렇게 수학이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이유를 찾아보았지만, 아직은 다 핑계 같다. 수학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고, 국어는 질문만 보아도 답이 보였다. 내겐 수학 수업은 이해 과목이었고 철학이었고 논리였다. 복잡한 함수가 0과 1로 귀결되는 과정이 너무 아름다웠다. 수업시간이 즐거웠다. 반면 수학’시험’은 문제를 읽어도 모르겠고, 또 모르겠고, 성적은 나빴다. 국어는 문제만 잘 읽고, 잘 생각해 잘 답하기만 하면 정답이 됐다. 몰입하면 손이 절로 써 내려가는 연애편지 같았다. 나의 질풍노도의 시기는 이렇게 짝사랑과 수학과 글쓰기가 뒤엉켜있다.

 

 가보지 못했고,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해, 한 발짝 앞도 보이지 않은 길은 미련을 버려야 할까? 짝사랑이 지나치면 잡착 같은 것이니 말이다. 반대로 애쓰지 않아도 익숙하고 쉬운 길로 걸어가야 하는 걸까? 그런데, 정작 나는 아직 어느 길도 첫발을 떼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상담이 필요한 학생처럼 수학과 문학, 어느 쪽도 첫발을 떼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데, 삶은 시험을 치고 연애편지를 쓰는 어중간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웃으갯거리 취급받는 연애편지가 문학이 되려면,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것이 기지旣知의 것이 되려면 딱 한 발, 먼저 한 발만이라도 치열하게 내딛으며 살아야 했다는 것을...

지금의 내 나이 때쯤이었던 선생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한 말일까, 자신에게 한 말일까.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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