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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Aug 01. 2020

아내의 책

사랑이란 관계에 대해

 2007년 8월 23일, 다음 카페 독서클럽을 운영하다, 처음으로 오프라인 독서모임을 가진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내 삶이 대박을 쳤음을 결정지은 날입니다.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이기 때문이죠. 사실 첫 모임에서 전 아내의 얼굴을 단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서로 맞은편에 앉게 되었는데, 아내는 창이 긴 모자를 쓰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테이블의 끝에 앉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라도 내내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했기 때문이었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참 차분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독서모임이라, 헤어질 때 잠깐 스치듯 본 얼굴을 기억에 잡아두긴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나질 않더라고요. 다만 그 목련꽃 같은 목소리만 귀에 맴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아내의 목소리에 반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가 처음으로 추천한 책은 매튜 캘리의 [친밀함]이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현대판이랄까?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진정한 사랑의 관계는 서로가 더 나아지기를, 성숙하기를 도와주는 관계’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 [사랑의 기술]을 읽기 전이었고, 그와 비슷한 책조차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매튜 캘리의 글은 제 마음을 들끓게 했습니다. '아!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제임스 레드필드의 [천상의 예언]에서는 '상호의존관계'의 남녀관계를 매우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사람은 우주와 하나가 되었을 때 완전한 충족감을 가지는데, 많은 경우 사랑에 빠질 때- 특히 한눈에 빠진 사랑은 우주와 하나되려는 길을 멈추고 서로에게 머물러 서로에게 에너지를 얻으려 한다는 것이죠. 사랑에 빠져본 분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두 알 겁니다. 밥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온종일 붕 뜬 마음.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자체로 마음이 가득 찹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너무 익숙해지면 함께 있어도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는 때가 오지요. 그 때부터 대화는 되돌이표를 반복합니다. 상대를 내 뜻대로 하려하고 서로의 에너지를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과 같은 모습을 띄게 된다. 아마 이런 때에는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겁니다. 이 책은 남녀의 서로 다른 언어에 대해, 사고방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다시 사랑이 샘솟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 한사람이 온전해지지 않는다면 갈등은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지금 언급한 책들은 모두 독서모임에서 다루었던 책들이네요. 우리 모임은 연령대가 다양했습니다. 사랑은 나이에 상관없이 참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게 합니다. 노년은 원숙한 관계, 혹은 반쯤 포기한 사랑에 대해, 스무 살은 가슴아린 짝사랑과 풋풋한 설렘에 대해, 그리고 서른즈음의 아내와 저는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서 남녀는 어떤 관계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조금씩 아내에게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첫 아이가 생기고, 아내는 몇 권의 책을 구입했습니다. 주로 119 홈닥터, 아기 마사지, 이유식 만들기 같은 육아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둘째도 사내아이었습니다. 큰 아이가 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할 때쯤, 아내는 사내아이 키우기 같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책'을 구입했습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초등교육, 공부머리 독서법 같은 책을 구입했죠. 아내는 유독 학습지 종류는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 서점이든 아이의 독서력에 맞추어 생각을 키울 수 있는 책을 이리저리 찾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결혼 전이었으면 골랐을 법한 책들은 한번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다 필요에 의한 책들이긴 한데 순전히 자기를 위한, 그저 마음이 당기는 책 한 권 구입하는 걸 보기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아내에게 김미경 님의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를 선물했습니다. 아내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책장에 꽂아 두었습니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을 하루 종일 돌봐야 하는 날이 지속되면서 아내는 무척 지쳐갔습니다. 잠깐 조깅만 하고 돌아오자는 아내를 설득해 함께 등산을 했습니다. 시원한 산바람을 느끼지도 못하고 또 아내는 아이들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만하면 저들끼리 놀아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습니다. 꼬맹이에겐 오랜만에 실컷 텔레비전이나 보라 해두었으니 이 녀석들 웬 횡재냐 싶었을 겁니다. 아내에겐 두어 시간 만이라도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여보 우리 손잡고 갈까?

- 가족끼리 그러면 안돼

당신이 처음 고른 책이 <친밀함>이었던 기억 해?

- 그랬나? 오래돼서 기억도 잘 안나.

당신 결혼하고 애들 책만 산거 알아? 이제 당신이 보고 싶고 좋아하고 관심 있는 책을 골랐으면 좋겠어.

- .... 그래, 그래야겠어.


 방송 편성일이 다가오면 한 두 주는 매일같이 자정이 넘어 들어오는 제가 ‘보고 싶은 것 좀 보라’고 염치없이 아내에게 할 말은 아닌 걸 잘 압니다. 아이들은 전형적인 인디고 아이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명상을 해서인지 영성이 밝고, 감성이 풍부하다. 자기 주장도 강하고 신체 에너지도 넘칩니다. 아내는 버거워했습니다.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라도 합리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결코 자기 고집을 꺽지 않았습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저의 아이들도 집안의 거의 모든 물건을 만들기 재료로 씁니다. 정리정돈을 좀 하라고 하면, 아직 놀고 있는 중이라 말합니다. 그러고는 잘 때까지 놀다가 엎어져 골아 떨어지죠.  퇴근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은 그야말로 난장판입니다. 괭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아내가 '늦었네.'라며 일어날 때, 저도 모르게 움찔댑니다. 슬쩍 쳐다보는 아내의 눈에서 무언가가 번뜩이는데, 마치 무림의 고수들에게서 나오는 그것과 비슷하달까. 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창이 긴 모자에 얼굴을 보지 못해도 참 고왔던 목소리를,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그때와 목소리가 달라졌습니다. 신발을 벗기 전 '지금 행복하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세 번 마음으로 외우며 집에 들어섭니다.


얼마 전 이사를 했습니다.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은 무슨 집에 이렇게 책이 많냐며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애 있는 집에 이정도가 별일일까? 참 뾰롱뾰롱한 성격이다 했는데, 한 주 내내 뒷정리를 하며 난 참 나쁜 고객이었구나 반성했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좀 정리해야겠다 생각했지요. 아내와 팔책, 버릴 책을 골랐습니다. 저는 버리자고 했지만, 아내는 홈닥터와 요리책을 다시 챙겼습니다. 아내의 책을 모아보니 겨우 몇 권, 책장 한 칸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버리자는 제 말이 민망해졌습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오리지널 종이책을 보내왔습니다.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이란 책인데, 큰 아이는 책을 훑어보더니, '어려워. 잘 이해가 안 돼'라고 했습니다. 아직 어른의 복잡한 감정을 읽어내긴 어려운가봅니다. 아니면 어른들이 쓸데없이 복잡할지도.... 아내가 '- 나도 빨강머리 앤 정말 좋아했는데. 내가 읽어야겠네'라고 했습니다.  책의 ‘임자’가 정해졌습니다.

 아직 거실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 고민입니다. 아내에게 가족들 모두 둘러앉아 책도 읽고 차도 마시는 길고 넓은 우드 슬랩 탁자를 놓자고 졸랐습니다. 서재형 책장을 여기에 저기에 넣자며 큰 눈 뜨고 팔을 휘휘 저으며 설명했습니다. 아내는 이런 눈빛으로 저를 쳐다봤다. ‘저런 인간이 내 남편이구나!’

 저는 그런 아내를 이렇게 쳐다보았습니다. ‘이 여자가 내여자라니’


 새로꾸밀 거실 책장에는 아내의 책을 많이 꽂아두고 싶습니다. 아내가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에 관한 책들로요. 그 중에 자리가 남으면, 언젠가 나올 제 책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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