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의 책방 Oct 28. 2021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책 너머엔 무슨 책이 있을까

 이 글은 월간에세이 10월호에 실린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의 원고 초안입니다.

 

 늦은 저녁에 걸려온 전화, 아내가 반갑게 받더니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잘 모르겠어요, 어머니. 그이가 예전부터 하고 싶다곤 했는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짚이는 데가 있어 얼른 핸드폰을 찾아 켰다. 역시나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 알림이 떠 있었다. 아이들을 씻기느라 전화를 못 받았는데,  마음이 급하셨는지 아내에게 전화하셨나 보다. 내가 너무 일을 서두르고 있었던 걸까? 어머니의 걱정은 낮에 보낸 내 문자 때문이었다.

 이날 모처럼 아이들과 수목원에 나들이를 하러 갔다.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함께 보낸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내의 얼굴은 밝았다.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까진 아니더라도, 평범한 일상 가까운 행복을 담을 수 있는 날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얼마 전 가게를 하나 봐 둔 것이 있는데 한 번 들러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사실 몇 해 전부터 나는 동네 책방을 운영하고 싶다는 바람을 아내에게 내비쳤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아내는 내 꿈은 ‘동네 책방을 여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가게를 보고 왔다는 말에 그리 놀라지 않은 건 이 때문이었다.


 며칠 전, 직장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 스타벅스가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대학교 후문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 중고등학교 맞은편에 자리 잡은 25평 가게, 책뿐만 아니라 아기자기한 문구를 팔아도 제법 운영이 괜찮을 것 같았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집주인이 온화한 성격인 데다,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이라 필요한 추가적인 실내 공사는 보수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더구나 권리금도 없단다. 주변엔 대학생 원룸촌이니 맥주나 와인을 같이 팔면 학생들이 많이 찾을 것이라 귀띔해 주었다. 내가 팔랑귀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세우며 들어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 곳이다. 해 볼 만한 곳이야’

 그러나 하고 싶다고 덜컥 계약할 수는 없었다. 월세나 초기 자금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직장을 유지하며 책방을 운영하기 위해선 아내의 이해와 참여가 필요했다. 독립서점을 꾸려가는 분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웬만큼 이 일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저마다의 고초가 있었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잘 나가는 가게들도 문을 닫고, 거의 모든 유통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있는 시기에 가뜩이나 수익 나기 어려운 동네 책방을 연다는 것이 무모한 일일지 모른다. 어려운 결정을 혼자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망설이는 내 모습에 아버지가 겹쳐 보였다.


 중학생 때쯤, 어느  저녁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농약 가게를 열려고 하는데 어머니와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아버지는 평생 이발을 해오셨다. 가난으로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머슴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이렇게  수가 없다는 생각에 13살에 고향을 떠나셨다. 아는 사람   없는 타지에서 처음으로 얻은 일자리가 이발소 보조였다.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고 닦고 수건을 데워오며 손님들 잔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 이발을 배우셨다. 자격증을 따고 이발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던 날은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고 하셨다. 이발은 당신의 젊은 시절 가난도 가족들의 부양도 모두 해결해준 기술이었다고 자랑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평생직업이라 믿어왔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신 거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아버지는 마흔 중반, 지금의  나이쯤이셨다. 어머니와 우리 오누이들은 모두   들고 반대했다.  번을  설득하셨지만,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에 결국 포기하셨다. 아버지는 포기와는 거리가  분이었다. 대한민국에는 당신 고집을 꺾을 사람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시절 아버지를 내내 보며 자란  눈에는  말이 허풍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타지 생활을 하며 억울하고 서러운 일을 겪으며 버텨 오신 아버지는 가진  고집과 독기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포기하셨다. 가족의 반대에  옹고집을 꺾었다. 뒷날 ‘그래도 한번 해보시라고   그랬나. 아버지께 미안하네하니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농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시작해.’

 가부장의 전형이었던 아버지가 왜 낯설게 우리 의견을 물었을까? 독불장군이었던 분이 왜 가족들 반대에 마음을 돌리셨을까? 지금에서야 어렴풋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불안하셨던 것이 아닐까? ‘내 선택이 가족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내 꿈이 가까운 행복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는 일이 아닐까? 일상을 글로 옮기며 종종 가족 이야기를 붙잡아 남겼다. 스쳐 지나갔다면 알지 못했을 아내의 모습을 글을 쓰며 발견하곤 한다. 나와 함께 한 많은 선택에서, 이 여인은 참 많이도 네게 양보하고 배려했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 아내의 표정에 망설임이 보였다. 반대 이유와 가능한 방법 사이에서 고심하는 눈치였다. 둘 사이를 서성이던 큰아이가 다가와 말했다. ‘아빠 꿈, 이번에는 이뤄지긴 힘들 것 같은데?’ 팽팽한 풍선처럼 긴장했던 가슴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와 아내를 보았다. 그리고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하지 않아도 이미 행복함을 깨닫게 되는 날이 있다. “괜찮아. 안 이뤄져도. 아빤 이미 꿈을 다 이뤘어. 나머지 인생은 덤이야.”

 아내에게서 어머니 전화를 빼앗듯 가져왔다. “어머니, 그냥 한 번 의견을 여쭤본 거예요. 아버지도 예전에 우리한테 의견을 물어보셨잖아요. 어떨까 한 번 알아보는 정도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전화를 끊고 아이들 머리를 말리고, 눈이 반쯤 감긴 막내를 안고 불을 껐다. 행복한 하루가 잠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