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생로랑의 힙한 그녀

by 오후의 책방

버스가 왔다. 출퇴근길 집에서 회사까지 가는 유일한 버스, 난 매일 314번을 탄다. 종점에서 바로 앞 정거장이라 자리는 늘 여유롭다. 그 여유 덕분에 양보가 쉬워서일까?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모두 탄 뒤 맨 마지막에 버스에 오른다. 같은 버스를 타는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 아마도 일 년 중 백번은 넘게 마주쳤을 거다. 하지만 우린 서로를 모른다. 형식적인 인사도, 가벼운 눈인사도 하지 않는다.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도 본 듯, 안 본듯한 사람들이 함께 탔다. 그들 중 아무개에게는 나도 아무개 정도일 것이다.


뉴욕 출장 때, 브루클린의 게스트 하우스를 빌려 며칠을 보냈다. 늦은 시간 출출해 1달러짜리 피자를 먹으러 나섰다. 가게 앞 가로등 불 아래 서성이던 흑인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give me coin이라고 말했다. 어찌나 그 과정이 리드믹 하던지, 비트만 넣으면 뮤직비디오인 줄. 그는 동전을 받아, 1달러짜리 피자를 사 왔다. 내가 준 돈으로 산 피자, 나보고 한 입 먹으란 소리는 안 했지만 섭섭하진 않았다. 그는 마냥 즐거웠고, 잠시 우린 친구가 되었다. 다음 날 다시 가로등 불 아래, 노인과 마주쳤다. 그는 리드믹 하게 다시 동전이 있냐고 물었다. 그가 반가웠지만, 살짝 망설였고, 아! 이 관계 오래가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동전은 소중하니까.

브루클린 숙소에서 뉴욕타임스 본사를 오가며 일한 일주일,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카페테리아에서 눈이 마주칠 때면 그와 그녀들은 'Hi', 'Good morning'이라 말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긍정과 호감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좋은 것은 금방 익숙해진다. 나도 조금씩 먼저 인사를 건넸고 돌아오는 눈빛이 항상 싱그러웠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좋았다. 낯선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뉴욕이 '좋았다.' 이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매너인 걸까? 잘 모르겠다. 다행히 인종차별을 격지 않았고, 특별한 시빗거리도 없었다. 짧지만, 뉴욕은 좋은 기억만 남은 도시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어색한 출근버스, 자리에 앉아 옆구리에 낀 책을 꺼내 펼쳤다. 읽어 내려가던 곳을 얼른 훑어 찾았다. 한 페이지를 막 넘기려는 즈음,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섰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본 듯, 안 본듯한 사람들이 올랐다. 빈자리는 구슬퍼즐이 채워지듯 매워졌다. 짧은 찰나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흰 블라우스에 검은 통바지, 어쩌다 이브 생 로랑 숄더백에 눈이 갔다. 빈자리가 없어 그녀는 서 있었다. 타인을 이렇게 유심히 보는 건 실례겠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활자 위에 반짝이는 이브 생로랑 로고가 어른거렸다. 기억된다는 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아닐까? 이 잔상은 어쩌면 얼마 전 본 이브 생로랑의 영화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반 페이지도 못 넘긴 사이에 버스는 다시 멈췄다. 어, 생각보다 정류장 간격이 짧네,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브 생로랑 골든 메탈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그녀는 빈자리를 보고 앉으려다 멈짓, 무언가를 신경 쓰는 듯 멈췄다. 할머니 한 분이 버스에 올랐다. 그녀는 할머니가 자리에 편하게 앉도록 한 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인사도 없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무심한 듯,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겐 그렇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쉬워 보였다. 이브 생로랑의 그녀가 그렇게 힙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마 일 년 중 족히 수십 번은 같은 버스를 탔을 텐데, 본 듯 안 본 듯한 아무개였을 텐데. 순간 이브 생로랑의 그녀가 참 의미 있는 존재로 보였다. 뉴욕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 눈빛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기억하긴 힘들다, 하지만 힙하게 걸어와 동전을 달라고 했던 흑인 노인의 리드믹한 목소리는 잊히지 않는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잠깐 스치듯 보았던 그녀의 얼굴, 눈빛은 잊어버릴 거다. 하지만 까만색 이브 생로랑 숄더백을 볼 때면 문득 떠오를 것 같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멈추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자리를 양보하는 무신경한듯한 힙한 몸짓들. 이브 생로랑의 골드 메탈 로고보다 더 반짝이는 아무개 그녀의 배려심이.


눈빛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도 건네지 않는, 본 듯 안 본듯한 사람들을, 매일 314번에서 만난다. 무심히 무신경한 듯 힙하게 나는 오늘도 제일 마지막에 버스에 오를 거다. 빈자리가 있든 없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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